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왜 지체하시는가?" 2014년 4월 11일 새벽기도회 설교 (사순절33)
2014-04-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9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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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40411 금요일 새벽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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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1~16절, 사순절(33) 왜 지체하시는가?
* 설교 음성 : http://www.4shared.com/mp3/K538ljzmce/20140411__33_.html
사순절 서른세 번째 말씀으로, ‘왜 지체하시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를 비롯한 우리 지체들이 한 달의 십일조를 드리면 늘 그 예물을 가지고 주님 앞에 따로 기도를 합니다. 다른 예물도 귀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지만, 십일조 예물에 담긴 지체들의 땀과 눈물에 특별히 제 마음이 머물기 때문인 듯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새벽예배가 마치고 멀리 지방에 있는 종성이에게서 온라인으로 십일조를 드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던 대로 예물과 종성이를 위해 기도하고, 오늘 새벽 말씀을 묵상하는데, 문득 종성이와 처음 마주했던 시간이 생각이 나서 마음에 울컥함이 있었습니다. 당시 외국에서 돌아와 수능과 대입을 준비하던 그가 두 번이나 낙방해서 낙심하게 되었는데요, 그때마다 하나님께 드렸던 질문과 기도가,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인 ‘왜 지체하시는가?’였습니다. 한 해를 꼬빡 새벽 제단을 지키며 믿음의 우선순위를 잃지 않고 간절함으로 기도했는데도, 저와 종성이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과 앞에서 참 마음들이 어려웠습니다. 물론 지금은 저도 종성이도, 그리고 수많은 믿음의 지인들도 그 이유를 다 알게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정말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싸웠던 기억이 납니다.
주님의 응답이 지체되는 경험, 비단 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마 거의 모든 성도가 경험하는 가장 힘겨운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더딘 응답일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성정이 조급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유가 다른 곳에 있음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의 기록입니다. 아시는 대로 나사로와 그 가족은 예수님과 각별한 관계 속에 있는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와 같은 특별함이 나타나 있는데요, 본문 3절에서 주님께 나사로의 병을 말하는 사람의 말,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에서도 또 5절의 요한 사도의 증언,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에서, 그리고 11절에 나사로를 부르는 주님의 호칭 ‘친구 나사로’에서 우리는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의 특별한 사랑도 나사로가 질병에 걸리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질병은 고사하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굳이 요한 사도가 나사로의 부활을 전하면서 이러한 특별한 관계의 표현을 여기에 기록한 이유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니 예수를 잘 믿고 온전히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어도 얼마든지 원치 않는 질병에 노출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오늘 주님은 이 요한의 증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지난 실로암 맹인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고난은 단지 죄의 문제나 하나님의 사랑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와 정반대의 의미가 있음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갑니다. 주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친구의 질병을 고의로 내버려두시는 듯한 모습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바로 나사로에게로 가시지 않습니다. 이틀이나 더 머물며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마치 나사로가 질병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사선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을 외면이라도 하시는 듯한 너무나 놀라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11절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나사로가 이미 잠들었고 이제 깨우러 가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단순히 수면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이의 죽음을 성경은 때때로 잠으로 묘사합니다. 비록 주님의 품에서 실제 잠이 든 것은 아니지만, 그 부활의 소망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히 잠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내일 읽고 묵상할 본문이기는 합니다만, 11장 17절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가 죽은 지 벌써 나흘의 시간이 지났고, 당연히 장례도 끝나, 그는 이미 무덤에 안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시간을 거슬러 주님께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전해 준 그때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주님은 어디 계셨을까요? 10장 40절 말씀에 보면 나옵니다. 바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입니다. 거기서 지금 나사로의 집까지는 성인의 걸음으로 하루가 걸립니다. 따라서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이 하루, 예수님이 듣고 그대로 머무신 이틀, 그리고 다시 주님이 베다니로 가시는 길 하루, 이렇게 나흘의 시간이 최소한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하러 사람을 예수님께 보낸 바로 그 날 나사로가 죽은 것입니다. 주님이 고치러 가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은 채 그 소식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이 기다린 이틀은 나사로가 죽어 그 장례를 치르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본문 8절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만류하는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제자들은 주님더러 그 길은 죽음의 길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라고 만류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기꺼이 그 길을 가십니다. 거기 주님의 사랑하는 친구가 있으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죽은 나사로에게로 굳이 가야 하는 이유를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합독하시겠습니다.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본문 15절에서 다시 설명됩니다. 1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15.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그렇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나사로뿐만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과 마르다, 마리아 모두에게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그들에게 보여질 것이며, 또 그것이 궁극적으로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일어나게 될지를 믿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모두 아시는 대로 나사로는 무덤에서 살아나옵니다. 죄의 가장 큰 무기였던 죽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몸에 수의를 입은 채로 나타나, 훗날 주님의 부활과 모든 믿는 자의 부활의 예표가 됩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되살아남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자들이 온전히 믿도록 만드십니다. 이 사건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도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예수의 부활을 통해 우리도 다시 삶으로 나아오게 된다.”는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될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인데, “내가 죽어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언약대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믿도록 미리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일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 부활의 확신, 이보다 더 중요한 확신은 없습니다. Talk Bible에서 강조한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보다 부활의 신앙이 더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입니다. 여기 사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같이 천국에 대한 신앙이 아닌 부활에 대한 신앙 위에 그리스도의 공동체 신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천국도 없으며, 부활이 없다면 구원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땅의 고난은 저주 외에 다른 의미가 없으며,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며 헛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주님의 지체하심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외면과 침묵이 말 그대로 무관심이요, 무능력이요, 사랑 없음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죽었고, 우리는 부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우리는 이제 비록 주님이 우리의 간구에 더디 반응하시고, 지체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담대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위한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이며, 그 일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으로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비록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것은 실패로 귀결되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더 놀라운 부활의 반전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7~18)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단지 먼 훗날 우리가 죽고 난 후의 부활을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서두에 종성이의 삶을 증언한 바와 같이, 우리가 살아내는 이 땅 위에서의 모든 삶 가운데, 이 부활의 믿음은 현실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며 우리의 고난에 무관심하시지 않습니다.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결코 아닙니다.”(벧후 3:9) 질그릇 같이 연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능력이 나타날 그 때가 속히 올 것입니다. 그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사49:15-16a) 이 말씀을 믿는 믿음 가운데, 지체하시는 주님의 발걸음 앞에 기쁨과 설렘으로 빚어진 온전한 기다림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