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 2018년 12월 2일 주일 설교

2018-12-02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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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2  대강절 첫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5:1~6,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 * 설교 음성파일 : 첨부된 파일을 다운로드 하시면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음질이 좋지 못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66) 본문 1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을 오늘 말씀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 삶 되기를 원합니다. … 오늘이 12월 첫 주이고, 계절도 겨울로 접어듭니다만, 지난 11월까지 주말에 결혼식이 꽤 많았습니다. 저희 종우, 채민이도 그렇습니다만 가을에 결혼하는 커플이 참 많지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여러 주례를 의뢰받으면서 알게 된 것이, 대부분의 신랑, 신부들이 결혼식을 어떤 형식으로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이 많다는 점입니다. 양가의 종교가 다르면 문제가 상당히 복잡하고요, 양가 모두 교회를 다녀도 고민은 또 있습니다. 예식을 예배 형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자유로운 형식으로 할 것인가, 먼저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부모님들은 대체로 예배 형식으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원한다기보다는 약간 ‘강요된 신념’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결혼식에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교회 분들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별 오해가 없고 무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오래 생각하시고, 그래서 강한 신념을 가지고 계셔서,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예식을 예배로 드리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부모님들도 계십니다. 반대로 신랑신부 중에는 절대로 예배 형식은 싫다는 커플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긴 해도, 신앙은 신앙이고 평생 한 번 있는 예식인데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대로 하고 싶다는 청년들도 꽤 많습니다. 신랑신부 각각의 개인적인 생각에 양가의 입장까지 있어서 조금 복잡해지는데요, 사실 이렇게 의견이 팽팽하게 맞설 때, 그럴 때 주로 저에게 주례를 부탁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 목사님이 집례를 하면 꼭 예배로 드려야 하기 때문에, 예배로는 아니어도 주례자는 목사인, 어떤 합의점이 필요할 때 제가 떠오르시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보수적인 신앙의 이미지는 아니어서 그러겠지요. 사실 신학적으로는 어쩐지 몰라도, 신앙적으로는 엄청 보수적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제가, 결혼은 반드시 예배 형식으로 하기를 원하시는 신랑, 신부의 부모님께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버님, 어머님, 예배는 오롯이 하나님만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 의식입니다. 거기에 다른 목적이 개입이 된다면 이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혼 예식은 그냥 결혼 예식으로 하셔야지 예배는 안 됩니다. 예식의 목적은 결혼이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셔서 예수님이 언제 예배 형식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결혼식을 예배로 하시겠다고 고집하는 건, 예배가 뭔지 잘 모르셔서 그런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뭔가 더 특별한 신적 가호를 받고자 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샤머니즘적 신앙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예배가 무엇인지부터 잘 생각하시고 이 문제를 다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으니 느낌이 어떠신지요? ‘그래, 예배 형식으로 하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그래 너 잘났다,’ 또 속된 말로 ‘좀 재수 없다’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네, 그래서 저도 그런 말은 빼고 오히려 신랑신부에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의 신앙적 양심이 그러하신 것이니, 두 사람이 조금 더 이해하라고, 내가 주례자로서 나름의 합리적인 합의점을 찾아보겠다고 말합니다. … 결국 결혼은 잔치여야 하고, 거기서 신앙이 좋다는 건, 포도주가 모자랄 때 포도주를 공급하는 것이지, 어디까지 마셔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계속해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우상의 제물과 포도주 문제는 오늘날엔 별로 크게 와 닿지 않는 것 같아서, 요즘 결혼식에 관해서 먼저 말씀을 드렸는데요, 여러분 조금 더 이해가 가시는지요. 이번에는 또 다른 이야기, 본문의 상황과 더 가까운, 그래서 조금은 더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여러분 장례식장에 가서 조문을 하실 때 영정 앞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분향 대신 헌화를 하고, 큰절 대신 선 채로 혹은 무릎을 꿇고 묵념과 기도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요즘엔 상주와 가족들에게도 큰절 대신 목례를 하는 경우도 많이 봅니다. 지난주에 저도 아주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만, 고인이 장로님이셔서 그런지 제가 가족들을 향해 목례가 아닌 큰절을 하려고 하니까 살짝 당황하시면서, 급히 저에게 맞춰 맞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인의 영정 앞에서 큰절을 하면 안 됩니까? … 과연 그것이 정말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인지요? 혹은 고인의 영혼이 마치 귀신이 되어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한, 일종의 샤머니즘적 행위라서 절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구약의 율법 십계명에서는 우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지요.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인데요, 그 해당 본문을 읽어드리면 이렇습니다.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아주 강한 어조인데요, 이와 똑같은 말씀이 다시 신명기(5장)에서도 기록되어 있고, 아시는 것처럼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돌아가신 분의 영정 앞에 절하는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나를 위해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 거기 절하고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 지금이야 시신을 병원의 별도 공간에 따로 모셔놓고 빈소에는 사진만 올려놓지만, 과거 저희 조부 장례식 때만 해도, 실제 그 시신을 병풍 뒤에 모신 채 장례를 치렀으니, 그땐 사진이나 형상이 아닌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한 것이니 지금과는 상황이 또 다릅니다. 물론 그때도 그리스도인들은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셨던 저희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부모님은 어린 저에게, 사랑채에서 그냥 자고 있는 척 누워 있으라고, 나와서 절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우상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 여기에 대해 생각이 다른 분들이 있겠지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제사나 성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묘나 영정 앞에 가족이 함께 절하며 떠난 분을 추모하는 그것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입니까? 절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정말 성경이 그토록 엄하게 금지하는 종교적 율례에 해당하는지요? 또 목례는 괜찮고 절은 안 된다면 어느 각도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신사참배라는 것 잘 아시지요? 일본 민간 신앙인 신도(神道)의 사원을 세워놓고, 거기에 허리 굽혀 절을 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동화는 물론 천황에 대한 복종심까지 강요한 것이 신사참배였는데요, 신앙적 이유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협박과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신사참배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와서 그 문제를 참회하는 일들도 벌어지는데요, 큰절은 아니지만 그건 엄연한 우상숭배지요. 그런데 당시 신사참배를 했던 기독교인들의 논리가 뭐였냐면 …, 신사참배는 단지 국가의식이고, 황국신민으로서 행해야 하는 국민적 의무일 뿐,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참배를 해도 우상에 대한 기독교 교리를 위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앞서 말씀드린 장례식이나 성묘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심각한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둘 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으실 겁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고기와 포도주는, 오늘로 치면 이 정도 급의 문제였습니다. 대단히 예민하고 또 신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여러 부분이 존재하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례식장에서 얼마든지 돌아가신 분의 영정을 향하여 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이나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거기서 절을 함으로써 고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우상숭배와 연관된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추도(혹은 추모) 예배라는 이상한 형식의 예배를 만들어서, 예배도 아닌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야 차라리 부모의 시신이 있는 곳에 가서 사진도 올려놓고 꽃도 장식하고, 가족들과 함께 절도 하고 하는 것이 죽은 부모를 제대로 애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훨씬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령이든 귀신이든 그들이 찾아와 먹을 음식이라고, 따로 상을 차리고 복을 비는 그런 행위를 괜찮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가족과 이웃끼리 함께 맛난 것 나눠먹기 위함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물론 저도 장례식장이나 선친 묘에 가서 절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 저처럼 생각하지는 않기 마련이고, 괜히 믿음의 양심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그저 목례로 기도만 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꼭 상주에겐 절을 합니다. 목례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는 슬픔과 고통을 나누고 싶고, 또 그것이 이 나라의 귀한 전통에도 어울리는 예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비록 너무 힘들긴 했지만 조문객들과 일일이 맞절을 하며 저는 개인적으로 참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행위 자체가 어떤 말보다 더 큰 애도와 위로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건 곤란합니다. “죽은 영혼이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신처럼 여겨 우상숭배 하는 것도 아닌데 절을 못하다니, 그게 더 이상한 신앙이다. 죽은 부모 앞에 절도 못하는 건, 오히려 귀신이 있다고 믿는 연약한 믿음일 뿐이다. 절을 해야 한다. 이걸 할 수 있어야 오히려 제대로 된 믿음이다.” 아마 이렇게 말하면 장례식장에서 멱살잡이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내 지식 자랑하고, 내 마음 편하자고 굳이 타인의 신앙적 양심을 건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지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신앙적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 그 자체는 남을 배려하거나 남을 기쁘게 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그저 자기신념이고, 자기만족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합당한 신앙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앎이란 그런 것입니다. 남보다 내가 조금 더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가 더 존귀하다는 착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인간의 타락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곧 지식의 나무로부터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특별한 지혜, 지식, 이런 것들은 가장 고상한 형태의 쾌락이며, 그것을 통해 인간은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런데 아시는 것처럼 기독교의 구원은 지식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요 17:3). ‘영적인 지식,’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아는 지식,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본문의 문제는 항상 우리의 현실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온전히 사랑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 지식은 양날의 검이 됩니다.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우리는 세상 지식을 소유했을 때처럼, 뭔가 가슴이 벅찹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우리는 그 지식이 곧 나의 실체요, 나의 삶 그 자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지식이 자라 열매를 맺어 실제 삶의 모습이 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된 것인 양 우쭐합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이 상태만으로도 매우 위험합니다. 자기 자신과 타인, 공동체 모두를 해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무기로 돌변합니다. 그것이 지식입니다. 지식이라는 위험한 칼에 멋진 칼집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지식의 검은 사랑의 칼집이 있어 진정한 검이 되고, 품격을 갖춥니다. 칼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칼집에서 보냅니다. 정말 필요한 한 순간을 위해 평생 칼집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게 지식입니다. 혼자 연마하고 열심히 갈고 닦지만 평소엔 그저 칼집에 담겨, 마치 잠든 것처럼 하나의 장식이 될 뿐입니다. 그렇게만 들고 있어도 칼은 위험하고 또한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만큼 칼은 위험합니다. 지식이 덕이 되고 남을 섬기는 도구가 되려면 대단히 높은 영적 무공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고린도전서 8장에서, “1.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고 경고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결국 지식은 늘어납니다. 그래서 교만이라는 잡초가 신앙 곳곳에 생겨나 자랍니다. 믿음은 가장 깊은 겸손, 자신의 죄인 됨에서 시작됐는데, 갈수록 그 은혜가 떨어지고 남의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점점 큰 칼이 되어 칼집을 부수고 나와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닙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이미 하나님처럼 높아집니다. 남을 받지 못하고, 약함을 담당하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증거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내 믿음이 연약하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말씀은 그냥 넘어가셔도 괜찮습니다. 교회에서 타인을 볼 때 뭔가 지적하고 싶지도 않고, 그의 태도나 행동을 바꾸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고, 다만 늘 그의 좋은 신앙을 본받고 싶은 마음만 들고, 나도 저런 믿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오늘 본문이 당장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 자라게 될 것이니까 그때를 대비하셔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연수가 오래 되고, 스스로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문제는 오롯이 믿음이 강한 자들의 책임입니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공동체에 덕을 세우고, 연합하고, 하나가 되는 문제는 전적으로 많이 알고, 오래 믿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바울이 1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이라고 해서, 이 문제를 자신을 짐으로 짊어지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믿음이 좋고, 남을 가르치고 섬기는 이들에게는 그만큼 큰 책임이 주어집니다. 직분은 그 믿음의 외적 표지가 되지요. 목사나 장로, 집사, 순장 등등, 직분은 늘 책임과 본을 보여야 할 의무를 가집니다. 어떤 본이냐? 약함을 담당하고, 연약한 자의 짐을 지는 본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를 바라보시지만, 그러나 책임은 늘 믿는 자에게, 특히 그 믿음이 강한 자에게 물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결국 마지막 10명의 의인이 낙오해서 멸망합니다. 수없이 많은 악인으로 인하여 심판을 당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낙오하고 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에 이릅니다. 요즘 묵상하는 예레미야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많은 다른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고 있는데요, (하나 자매는 그걸 하나님의 ‘단체기합’이라고 표현했는데), 왜 그들이 단체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복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결국 예수 믿는 사람들 책임, 교회 책임입니다. 교회는 믿음이 강한 사람,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이들의 부족함을 담당하고 짊어지는 책임이 믿음 좋은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약함은 결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약합니다. 그러나 결함이 있거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닙니다. 당연한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자라서 강해집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도 자라지 않는 건 그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자랍니까? 말씀도 먹어야 하지만 사랑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연약함을 받아들여주고 지켜주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걸 성경은 덕이라고, 덕을 세운다고 합니다. 서로의 약함을 결함으로 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자라고 강해지며 온전해질 것을 확신하여, 그 약함을 내 강함으로 담당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려면 반드시 내 기쁨이 아닌 타인의 기쁨에 초점을 맞춰야합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TV 프로그램을 보니까 거기 나오는 아빠들의 공통된 특징이, 아이들이 어떻게 하든 일단은 참고 기다려주더군요. 온 집안을 시리얼로 다 도배를 해도 아이가 기뻐하니 일단 내버려둡니다. 보는 저는 속이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그걸 다 받아둡니다. 그리고 아이가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이 들 때, 그때부터 치우기 시작하는데, 그 치우는 것도 놀이로 바꿔서 아이와 함께 합니다. 강함은 고단한 것입니다. 내 기쁨이 아니라 남의 기쁨을 먼저 생각해야 하니 힘든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가슴 뛰고 눈물 나는 그런 호르몬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진리에 속한 사랑’이고, 하나님의 성품이자,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한 삶. 어찌 보면 인간에게 너무나 당연한 그 삶을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본질로 봅니다. 나를 위해 사는 그 평범함을 성경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회심 이전의 삶, 죽은 삶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회심한 성품은 그와 다릅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타인을 섬깁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기쁨을 삼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타인의 기쁨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수 있습니까? 이미 그 안에 흘러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처럼,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충분한 사랑과 섬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처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은혜를 만끽하고 있으니, 흘러넘쳐서 능히 남을 기쁘게 하는 겁니다. 은혜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는데도, 믿음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는데도, 여전히 내 기쁨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우리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겁니다. 은혜를 소멸한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갈망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별 감동이 없고, 찬양을 불러도 뜨거움이 없으며, 예배를 드려도 별 느낌이 없다면, 이미 은혜가 바닥난 겁니다. 샬롬이 없는 것이지요. 당장 인공호흡이 필요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처방이 필요합니다. [안 되면 금식이라도 해야 합니다. 요즘은 금식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영성을 위해서도 금식은 아예 제외하고 사는 그런 시대가 되어 가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금식하심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겼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내 안에 은혜가 없다면, 내 삶이 혼인 잔치와 같은 풍성함이 없다면, 성도는 금식해야 합니다.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잘 살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금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 금식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외에 다른 데 소망을 두고 사는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아닌 것에 중독되어 살아가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믿음의 감격과 떨림이 없다면, 금식하십시오. 이왕이면 남들이 모르게, 소문 내지 말고, 조용히 금식하십시오. 자주 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갈망 없이는 절대로 믿음으로 부요해질 수 없고, 그렇지 않고는, 오늘 말씀을 살아낼 힘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며, 흘러넘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모의 사랑은 양이든 질이든 자식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얼굴에 사랑이 고스란히 남는 겁니다. 그리고 그의 삶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내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기쁨을 위해서, 내 ‘자랑’이 아니라, 타인의 ‘자람’을 위해서 쓰이는 저와 여러분의 영적 지식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권면 드립니다. 너무 티 내지 말고 섬기십시오. 여러분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지 말고,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십시오. 내가 강한데 그럼에도 섬긴다, 이러지 말고, 자랑할 것 다 자랑하고, 비판할 것 다 비판하고, 그러고 나서 그래도 내가 참는다, 이렇게 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그렇게 은밀하게 담당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알아주거나 보상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런 배려이어야 합니다. 한 청년이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돈이 너무 없어서 점심을 사 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연세 많은 교수님이 학생들과 함께 대화를 하다가 큰 소리로 이렇게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아, 우리 와이프가 요즘 요리하는 재미에 빠져가지고, 아침부터 요리를 해서 도시락을 싸주는데, 이거 먹는 게 너무 고역이라고. 안 먹고 버릴 수도 없고, 다 싸서 그냥 가져갈 수도 없고, 나는 도시락보다 학교 밥이 더 좋은데, 이거 먹는 게 너무 힘들다.”고. 혹시 좀 누가 도와줄 수 없겠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 그 가난한 학생도 있었는데, 옆에 있는 친구들이 사정을 이야기해서, 결국 그 학생이 교수를 도와주기로 했고, 그래서 1년 넘게 교수의 도시락 먹는 걸 도와줬답니다. 그런데 훗날 졸업하고 나서 알고 보니 그가 독신이었다는 겁니다. 섬기고 돕는 것이 내 의요, 내 영광이면 말짱 꽝입니다.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서로를 받으십시다. 여러분, 피자를 주문하면 그 안에, 피자를 붙들고 있는 발이 세 개 달린 플라스틱 물체를 보게 되지요. 그걸 뭐라고 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네, ‘피자 세이버’라고 한답니다. ‘피자를 구해주는 존재’이지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이거 없으면, 배달하다가 피자가 다 망가집니다. 그 귀한 토핑은 박스에 다 달라붙고, 피자가 이리저리 나뒹굴어 엉망이 됩니다. 그렇다고 누가 피자 세이버에 주목하지도 않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뽑아서 버려버립니다. 저는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그런 피자 세이버 같으면 족하다고 믿습니다. 타인을 받고 섬기는 그 자체로 만족하고 잊혀지는 것,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가장 강한 믿음, 가장 존귀한 사랑일 겁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서로를 그렇게 섬기며, 그 보배로운 신앙까지, 우리 다함께 자라 가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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