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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해 6.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2018-10-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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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7 수요 성경 강해 ----------------------------------------- 출애굽기 3장 13~22절,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 설교 음성파일 : 용량으로 음성을 첨부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원고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하지만, 모세는 계속 머뭇거리고 어려워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지금 당장의 감정이나 흥분에 사로잡혀 결정하지 않고, 차분히 하나님의 음성 앞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다시 질문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또 다시 질문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는 …, 그런 조심스럽고 주도면밀한 모습으로 반응한다. 그런 조심스런 과정 속에서, 모세의 관심은 이제 ‘내가 누구이기에’에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는, ‘당신이 누구이기에’로 이동해간다. 모세, 네가 누구이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고, 그 백성을 인도하여 내리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그러자 이제 모세는 질문을 바꾼다. 그럼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13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했다. 이 대목을 얼핏 보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미 모세의 마음이 바로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기로 확정이 된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여러 영어 성경의 번역처럼) 조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간다면”이라는 조건을 전제한 채 모세는 질문한다. 지금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제가 가겠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간다면 뭐라고 당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지에 대해 여쭙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것도 자신의 하나님이 아니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혹자는 이런 모세의 모습이 믿음이 부족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이라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13절의 질문에 나타난 모세의 예상이나 걱정처럼,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모세의 관심이고, 염려이며, 괜한 두려움이다. 모세는 지금 자신의 걱정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실상 애굽의 히브리인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질문을 바꿔, 누가 더 하나님에 대해 잘 알겠는가? 애굽에서 노역으로 고생하며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인가, 아니면 애굽의 왕자로 40년, 미디안에서 40년을 산 모세인가? 이것은 분명 모세 자신을 위한 질문이며, 그 이면에는, 자신이 히브리인들에게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을 내가 모를 수 있다는 염려가 깔려 있다. 그리고 지금 모세는 그 염려를 하나님께 내려놓고 있다. 모세는 아직 모든 것이 두렵다. 모세는 어떻게든 이 소명을 거부하고 싶다. 4장에 가서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화를 내며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여러 기적들을 통해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새로운 핑계를 대고, 이젠 내가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변명을 하자(4:10),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고 반문하시며 내가 너의 입과도 함께 하겠다, 너에게 할 말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할 말이 없어진 모세가, “주여,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공동번역)라고 사양하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화를 내시며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그가 너의 대변인이 될 거라고 약속하신다. 물론 하나님이 화를 내실만큼 집요하게 사양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얻게 된다는 것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모세는 그 대화를 통해 믿음의 확신을 얻고, 지팡이를 얻고, 사람을 얻는다. 그게 없었더라면 그는 분명 훨씬 더 어렵고 외로웠을 것이며, 그 길을 가는 과정마다 힘든 믿음의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자세히 구했고, 그 구하는 바를 받는다. 구하는 그만큼 얻는다. 모세의 질문은 한 줄인데, 하나님의 대답은 수십 줄이다. 그게 하나님의 응답하시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강조되는 동사가 하나 있다. 14절부터 15절 사이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사가 무엇인가? ‘이르다’(말씀하다)라는 동사다. 14절에, 세 번 반복되고, 15절에도 두 번 반복된다. 그 중 네 번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그 ‘이르시되’가 모세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시고 우리 질문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잘 묻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되고, 더 온전한 믿음을 누리게 됨을 잊지 말자. 당연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에 있어서, 담대하고 확신에 찬 믿음도 좋다. 다윗처럼, 골리앗 앞으로 그냥 담대하게 나서는 믿음, 나머지는 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을 믿는 믿음도 정말 좋은 거겠지만, 사실 그런 믿음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다만 궁금하고 의심되고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께 솔직하고 진지하게 묻고 구하는 열심(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담대한 믿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하고 믿음이 그냥 생기지 않는다. 안 믿어지는 것,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것, 정말 두려운 것,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 같은 것, 그런 것을 하나님께 끈질기게 묻고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우리에게는 늘 필요하다. 묻다가 좀 혼나면 어떤가? 모세에게 화를 내셨지만 그게 전부다. 화는 화대로 내시고, 모세가 요구한 건 다 들어주시니,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친절하시고, 인내심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강한 쇳소리를 내며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열심히 묻고 듣는 온유한 믿음임을 잊지 마시고, 늘 하나님께 묻기를 열심히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또한 모세와 하나님과의 이 대화가 중요한 것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의 이름과 성품이 자연스럽게 드러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이 계시된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통해, 그들의 소명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가가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택하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면서 그 십자가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비로소 새롭게 나타나신다. 그게 하나님이 이 땅에 당신을 알리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 스스로, 중간 매개 없이, 당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신다. 물론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명확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는 자연을 통해 완전히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된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사람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사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사람을 통해 드러내신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정확할 수 있는 방법인가? 중간의 매개 없이 그냥 direct로 하나님의 계시가 세상에 임한다면 더 정확하고 온전하지 않은가? 굳이 사람이라는 연약한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난다. 이 말을 역으로 생각한다면 이렇다. 만약 이 땅에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가 없다면,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이가 없다면, 그리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행동으로 인하여 구원을 경험하는 이가 없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나시고 드러나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소명은 하나님의 계시의 동전의 이면이다. 소명은 단순히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다. 모세는 더 이상 모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집착하시고, 늘 함께 하시며, 그를 높이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일꾼들을 높여 사용하신다. 지난주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소멸시키거나 탈진시키지 아니하시고, 더욱 우리를 빛나게 하신다. 이것은 세상의 ‘이용’의 방식이 아니다. 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나를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그 소명 가운데 함께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나를 드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나, 실상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와 함께 타오른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이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는 모세의 변명에 하나님은 형 아론을 대변자로 삼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까지 하신다. 4장 16절,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실제로 하나님은 훗날 아론과 미리암에게 “(모세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본다. 그는 내 종이다. 어째서 그를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신다. 반면 하나님의 종은 보호하시며, 편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는 이들을 반드시 하나님 같이 빛나게 하심을 믿는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종이 되고, 낮아지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 자리가 곧 나를 영화롭게 하시며, 나를 존귀하게 하시는 자리임을 믿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그 모든 것이 실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인정하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높이시는 것은,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강조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빈손으로 가지 아니할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대단히 뜻밖의 명령을 내리신다. 21절과 22절인데, 모든 히브리 여인들은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는 말씀이다. 그러시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고 말씀한다. 여기 22절 마지막 동사, ‘취하리라’[나짤]는 (아래 주석에 있는 것처럼) ‘약탈’의 의미를 가진다. 사실 이 단어 ‘나짤’은 매우 독특한 단어이다. ‘취하다,’ ‘약탈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구원하다’의 의미도 가지낟. 8절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에서 ‘건져내고’라는 동사가 ‘나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보복과 회복을 전제로 한다. 가난한 자 억압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을 위해 보복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높이시는 방법은 하나님의 공의와도 연관이 깊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빈손으로 애굽을 떠나게 하지 않으신다. 21절 마지막에 ‘빈손으로’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레캄’이다. 왜 빈손, ‘레캄’이면 안 되는가? 그들이 애굽에서 일한 노동이 있기 때문이다. 이 단어, ‘레캄’이 창세기에서도 사용된다. (어디일까?)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야반도주하여 나올 때, 라반에게 들켜 만나게 되었을 때 그에게 야곱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 하나님 … 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1:42) 여기 외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드러내실 때, 이 ‘레캄’이라는 말이, 부정과 함께,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으로 계속 등장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상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축복하신다. 라반에게 빼앗긴 많은 임금에 대해 하나님은 공의로 야곱에게 보상하신다. 애굽인들이 빼앗아간 수많은 히브리인들의 노동의 대가를 하나님은 다시 빼앗아 보상하신다. 그들이 받았던 학대와 억압에 대해 하나님은 보상하시며, 그들이 험악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받지 못한 임금을 모두 가지고 나오게 하신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애굽과 바로와 싸우시는 것이고, 그들을 많은 재앙으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그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부리는 자리에 있을 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하나님이 갚아주심을 믿고, 힘껏 공의를 행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거지처럼, 패잔병처럼, 피난민처럼 구원하시지 않는다. 그들을 존귀한 자로 구원하시며, 그들의 가치를 돌려받게 하심으로써 가치 있는 존재로 구원하신다. 우리가 가치 있어 구원 받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가치 있게 하신다. 그리고 그 가치 있는 모습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다. 특별히 그들의 자녀들을 꾸미라고 명령하신 것에 주목해야 한다. 어른들은 그냥 탈출해도 별로 자존감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유를 얻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이나 장신구들로 인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받는다. 아이들은 내면의 자신감이 외부에서 온다. 하기야 어디 아이들만의 문제이랴. 우리도 실은 그런 경험을 할 때가 많다. 우리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늘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외모에 대해, 어떤 사람은 건강에 대해, 어떤 사람은 지식에 대해, 어떤 사람은 물질에 대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존감이 부족하다. 세상이 그렇게 우리를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고 그 기준에 따라 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I feel pretty’라는 영화를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뚱뚱하고 못생긴 주인공 여자, 그래서 모든 일에 자신감이 없고 무기력하던 이 여자가 어느 날 어렵사리 찾아간 피트니스센터에서 사고를 당한다. 그녀가 운동 중에 타고 있던 자전거가 그 몸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심하게 머리를 다친다. 그런데 그 후유증으로, 갑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게 된다. 자기가 대단히 매력적인 여자라고, 너무나 아름답게 변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된다. 사실은 그녀의 머리를 다쳐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데, 본인은, 그 사고로 인해 자신의 몸이 변했다고 믿는다. 그러자 없었던 자신감이 충만하게 된다. 놀랍게도 자신감이 생기자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이 다 술술 풀리기 시작한다. 직장에서 원하는 포지션에 이르게 되고, 연애도 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동안 우러러보던 사람들이 오히려 그녀를 찾아와 상담을 하고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다 다시 원래대로 정신이 돌아오자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나오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 자의식을 가지고 광야로 나가기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들은 존귀한 자였고, 가치 있는 자였으며, 영화로운 자들이었다. 부모는 내 자녀가 아름다우면 족하다. 그래서 자녀들을 꾸미라 하신다. 부모들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 자녀의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는가? 애굽의 것을 약탈하여 그 받은 것으로 자녀를 꾸미라는 이 하나님의 명령(22절)은 12장에 가서 정확히 성취된다. 12:35~36, “35.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36.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아멘) 이 얼마나 놀랍고 장엄한가? 나는 개인적으로 출애굽기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바로 이 부분인 것 같다. 홍해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보다, 히브리인들이 애굽 사람들의 것으로 그들의 자녀를 꾸며, 아름답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애굽 땅을 나서는 이 장면이야말로 가장 아름답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보다 더 정확히 묘사하는 게 없다고 느껴진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오는 당신의 백성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이미 자유인이며, 가나안의 정복자이며, 승리자임을 선포하신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가서 자유인인 것이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아 애굽을 나가는 것이다. 이 생각의 차이가 언제나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가졌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미 존귀하게 부르셨고, 그 모습으로 나를 자유케 하신다. 그 믿음으로 광야를 견디는 것이다. 조금 힘들어도, 어려워도,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존귀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한 부분임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들로 구원받았는지를 세상 가운데 드러낼 과제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삶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묵상하고 있는 예레미야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제 곧 묵상하게 될 말씀인데(다음 주 월요일),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나라가 망해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선포하신다. 너희를 향한 난의 생각을 내가 안다. ‘나의 생각을 내가 안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너희는 모른다는 뜻이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새번역) 이렇게 읽히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평안이요 희망이다. 절대로 재앙이 아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세상 가운데 담대하게 하고, 절망하지 않게 하며, 낙심하지 않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임을 드러내게 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고난과 고통도 함께 하시며, 그 모든 것 가운데서 하나님의 희망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보복과 약탈의 때가 반드시 찾아오며, 그 날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단지 겨우 탈출만 하는 피난민의 모습이 아니라, 은과 금, 화려한 의복으로 꾸민 영화로운 모습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이 모든 말씀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기억나는가? 창세기 15:13~14이다.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 가운데 있는 말씀이다. 그 약속 그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함께 하셨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제 당신의 신실하심으로 모세의 하나님이 되셨으며, 그 하나님이 다시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신실하게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을 신뢰하자. 부족한 것은 하나님께 묻고 구하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아들, 딸로서 세상에서 당당하게 믿음의 길을 걸어가자.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여 걸어갈 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신 것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 믿음의 삶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십시다.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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