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2018년 9월 23일 주일 설교

2018-09-2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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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오순절 열여덟 번째 주일 메시지 ---------------------------------------------------------- 로마서 12:9~13,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rom56.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56) 본문 12절의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아름답게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이 됐고, 또 내일이 추석인데요, 여러분 즐거우신가요? 네, 다행입니다. 그럼요 여러분, 오늘과 추석 당일인 내일 중에 언제가 더 행복하실까요? 네, 아마 대부분 오늘이 더 행복하실 겁니다. 이유는 한 가지죠? 내일이 되면 휴일이 하나 더 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휴일 직전이 가장 행복합니다. 해외여행을 위해 인천공항 제1터미널을 이용하다보면, 가끔 탑승동으로 한 번 더 이동할 때가 있습니다. 101번 이상의 게이트를 따로 모아놓은 곳이 탑승동이지요. 여기에 가려면 셔틀트레인을 이동을 해야 하는데요 …, 그 열차를 타고 내리는 구조가 …, 열차의 문이 양쪽으로 있는데요,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려서 열차를 타고 터미널로 와서 먼저 다 내리고 나면, 이제 반대쪽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출국하는 사람들이 그 열차에 타고 다시 탑승동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이 두 무리의 사람들의 표정을 동시에 볼 수 있게 되는데요, 그 표정이란 달라도 참 많이 다르지요. 물론 외국 사람이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는 예외이겠습니다만, 한국 사람들의 경우라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극명하게 갈립니다. 한쪽은 피곤과 고통과 절망과 슬픔이 서려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기대와 설렘과 기쁨과 소망이 가득합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여행이라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이미 경험하고 누린 사람들의 표정이 당연히 더 밝아야 하는데, 실상은 아닙니다. 아직 제대로 여행길에 오르지 않은 사람들,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 여행지의 행복을 아직 누리기 전인 사람들의 표정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밝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돌아오는 길에 그 다음 여행 예약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지요. 다 그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저는, 제가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기 위해 충청남도에 갔을 때, 충남 부여에 살고 계신 큰아버님이 마중 나오셔서, 나름 그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식당에 저와 저희 가족을 데리고 가셔서 사주셨던 그 식사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에 가장 맛이 없던 식사, 맛이 형편없어서 맛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아예 맛 자체를 느낄 수 없어서 맛이 없던 그 식사. 수많은 한숨과 함께 먹었던 그 식사가 저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차라리 입대 후 처음 먹은 훈련소 짬밥이 훨씬 더 맛있었습니다. 인간은 현재를 살지만, 또 현재밖에는 살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금 느끼는 즐거움은 상당 부분 미래에 매여 있습니다. 미래가 소망일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행복하고, 미래가 절망일 때 우리는 결코 지금 여기서도 즐거울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좀 힘들어도 그건 별 문제가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럼 여러분에게는 어떤 소망이 있으신지요?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소망으로 인하여, 소망 안에서 기뻐하라,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명령문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건 당연한 이야기인데, 왜 사도는 당연한 걸 명령문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까? 네, 우리가 소망 안에서 즐거운 게 아니라, 그저 지금 당장의 기쁨에 집착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이고, 또한 우리의 기쁨이 지향하는 그 소망이이라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소망이 아니라, 성도와 별로 상관이 없는 소망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우십니까? 소망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안정되고 평안한 삶입니까? 좋은 직장입니까? 건강입니까? 네, 그것들 역시 우리 삶의 중요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 사도가 말하는 소망은 아닐 겁니다. 그랬다면 본문 12절은 굳이 기록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그런 소망은 세상에 충분히 넘쳐 나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것들을 소망하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석에 밝은 보름달에게 비는 소원이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소망은 아닌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사도가 말하는 소망은 어떤 소망입니까? 이 소망이 어떤 것인지, 여기에 따로 설명하지 않는 것은, 이 소망에 대해 사도가 이미 설명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8장으로 잠깐 가봅시다. 23~25절입니다.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아멘. 여기 보면, 성도의 구원은 어떤 소망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고(24), 그 소망은 23절의 몸의 속량, 곧 부활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은 ‘양자 될 것’과 같은 말이며, 이 소망의 처음 익은 열매가 바로 성령이라고 강조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 성령이라는 처음 익은 열매) 아직 그 뒤로 수많은 열매가 더 남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도의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소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우리가 단 한 번도 소망해보지 않았던 그것에 대한 소망 말입니다. 어쨌든 구원받은 성도의 소망은 부활과 성령과 양자 될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그럼 그 소망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럼 무엇입니까? 16절로 가서 보면,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성령과 ‘양자 됨’이 연결됩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양자 될 것’이 ‘상속자’라는 말로 구체화됩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간단히 이걸 성도의 유산, 상속재산이라고 합시다. 지금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러나 장차 우리가 물려받을 상속재산이 있고, 그것에 대한 소망이 구원 받은 성도만의 고유한 소망임을 사도는 강조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저희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상속을 포기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을 때, 저희 가족 모두는 다 상속 포기 각서를 썼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 아버지 재산이 빚보다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1원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없었는데요, 그래도 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셨고, 제가 목사가 될 꿈을 갖게 해 주셨으니까요. 물론 아무리 그래도 재산도 좀 물려주셨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말이지요. 하나님의 유산은 다르겠지요.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니까요. 5장 2절에 보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네, 우리가 받을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당신의 자녀들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화로워지는 것입니다. (별로 감동하신 얼굴이 아니네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약속된 그 상속재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본문은 두 가지로 강조합니다. 하나는 그 유산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받게 될 기업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받을 상속, 예수님이 받으시는 것과 같은 상속 말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받을 주님 나라의 상속 기업이, 그리스도와 함께 받는 유산임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약속된 그 상속재산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방금 읽은 23절의 내용, 성령이 그 유산의 첫 열매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첫 열매이니 다른 건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일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 하나님이 우리의 첫 유산이자 다른 모든 유산의 보증입니다. 16절 말씀이 그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 성령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기업이 있음을 증언하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성도의 소망이 생기고, 그 안에서 기쁨이 생깁니다. 성도의 소망은 반드시 성령 하나님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성령을 향한 사모함과 갈증이 없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별로 감동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기대하던 천국이 아닐 지도 몰라요. 그곳은 결국 성령이 첫 열매인, 그런 유산들이 예비 된 곳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영광, 곧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가장 큰 유산인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체를 충만히 누리는 곳, 그곳이 부활의 천국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내가 행복하고 즐거운가? 과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는가? 천국을 갔더니, 하나님이 머리에 리본을 묶고 나타나셔서는, “자, 내가 너의 상급이요, 너의 기업이다.”라고 하신다면, 과연 여러분은 만족하시겠는지요? 하나님 자체가 여러분의 소망이요, 하나님 안에 여러분의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시편 4편에서 그렇게 노래했습니다. “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여러분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풍성한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주는 것보다, 즉 추석 연휴의 기쁨보다 더 큽니까?(*) 다윗이 햇곡식과 새 포도주가 주는 기쁨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보다 더 큰 기쁨과 만족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고 있고, 또 그 기쁨을 직접 누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걸 누리려면 먼저 무엇을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네, 성령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기도, 성령이 우리 안에 가득히 임재하여 우리를 통치하기를,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갈망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절대로 주께서 여러분 마음에 두신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언제나 하나님 자체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갈망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오랜만에 순별로 기도 제목을 나눴는데요, 그걸 순장님들이 제게 전달해줘서 저도 한 주간 그 기도 제목으로 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순장님들과는 나눈) 신기한 꿈도 꿨습니다만 …. [낮에 예배당에서 기도하다 잠깐 졸았는데, 짧지만 선명한 꿈을 꿨습니다. 주일 예배였던 것 같은데, 지금의 예배당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예배당에서 평소처럼 예배 준비 기도 모임을 마치고 성도들을 기다렸습니다. 예배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더는 성도들이 한 분도 오시지를 않아서, 무거운 마음으로 강단에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교회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아이들 몇몇이 큰 웃음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뒤로 부모인 듯 한 어른도 몇 분 더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뛰어 들어온 아이들이 다 김기웅 집사님께로 달려가더니, ‘할아버지~~’ 하는 겁니다. 밝은 얼굴을 한 민호와 진호, 그리고 집사님의 두 자부들이, 저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며 들어왔습니다. “좀 늦었지요, 목사님, 죄송합니다.” 너무나 반가워 제가 두 손을 들고 맞이하면서, 그렇게 꿈에서 깼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서 꿈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시겠구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이루시겠구나, 생각하며 제가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기도를 하면서, 여러분의 기도 제목 속에서 한 가지 이상한 걸 발견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두 부분으로 명확히 구별이 되는 겁니다. 한편에는 지금 내 삶에 필요한 무언가를 위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건강이나, 생업이나, 관계나, 가정이나 진로와 같은 그런 내용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도록,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발견하도록,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도록, 온전한 믿음의 가정 되도록, 이런 기도 제목입니다. 비율이 5:5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놀라운 사실은요 … 우리가 2018년 맨 처음에 서로 나누고, 올 한 해 함께 기도하기로 한 ‘2018년 기도 제목’에서는, 그 비율이 9:1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기도 제목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부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관계를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으로 적어내셨습니다. 매일 묵상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되기를, 하나님과 친밀해지기를, 하나님 주신 달란트 발견하기를, 주님을 더 알고 사랑하기를, 기도하며 일을 시작하기를, 신앙이 성숙되기를,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기를 … 등등, 거의 모든 기도 제목들이 하나님 안에 있는 부르심의 소망과 은혜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기 예외가 있다면 고 목사, 저 한 사람만 ‘희망이’ 제 2세에 대한 기도 제목이 제일 중요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아기가 안 생기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인하여 즐거운가,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 그게 다 기도 제목에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요한 사도가 성도들을 위해 그리 기도했잖아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서 1:2) 여러분,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여러분의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 반대로가 아닙니다. 우리의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듯, 우리의 영혼이 잘 되기를 구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여러분, 좋은 자리, 안정된 직장, 건강한 삶, 다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시 4:7)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들은 그저 좋은 학교, 안정된 직장, 평안한 삶, 거기서 참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허무하고 다시 공허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증거입니다. (그런 세상의 안녕과 안정을 소망하고 자랑하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부르심 안에서 소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주는 만족,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각 사람의 부르심의 소명들을 이루며 누리는 기쁨,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 “(하나님)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있지요. 결국 저와 여러분의 삶의 궁극적인 소명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그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채워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발견하고 이루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시고, 그의 삶에 소명과 소망을 부으셨지요.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 여러분, 그 말씀이 어떻게 됐습니까? 베드로의 형편없는 믿음과 연약한 모습으로 인해 그 약속이 무효가 됐습니까? 아니면 주님 약속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까? 네,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데 정확히 3년 걸렸습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우리 안에 품게 하신 소망에는 부도가 없습니다.] 주중에 한 목사님이 링크를 걸어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놀라운 교계 소식 하나를 듣게 됐습니다. 우리나라 가장 큰 교회 중의 하나인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님이 부임 8년 만에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케냐 선교사로 가신다는 결정을 성도들에게 발표하신 겁니다. 탈법을 저지르며 기어이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교회도 있습니다만 …, 진정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아, 현재와 미래의 모든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하고, 그것을 함께 축복하는 목사와 교회가 있음에 마음이 놓입니다. 여러분, 베드로 사도는 그와 같은 소망을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 a living hope, 말이 좀 이상하지요. 산 소망이 있다면 죽은 소망도 있다는 말인가? 네, 사도가 ‘산 소망’을 말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함께 하는 걸 보면, 산 소망이란, 부활 안에 있는 소망, 부활과 함께 찾아오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그것을 향한 소망을 말하는 걸 겁니다. 우리의 몸이 죽었을 때, 함께 썩고 함께 쇠하게 될 그런 것을 향한 소망이 아니라, 그때도 우리 안에 사라지지 않을, 아니 부활의 때에 비로소 그 열매와 영광이 드러날 그 무언가를 향한 소망, 그것이 산 소망인 것이지요. 여러분, 그 소망이 지금 여러분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망으로 인하여, 그 소망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산 소망을 회복하고,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신 이유와 그 부르심의 풍성한 소명들을 온전히 발견하고, 이루어나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처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노라고 당당히 선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8세기 미국의 영적 부흥을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나쁜 것은 좋은 것으로 바뀔 것이고, 우리의 좋은 것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최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Repeat) 그 최고의 것이 무엇인지, 열심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산 소망 안에서 온전히 즐거워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우리의 이 땅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여행을 앞둔 한 여행자의 감격과 설렘과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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