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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2018년 4월 29일 주일 설교

2018-04-29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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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9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9장 6~29절,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429.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용량이 커서 파일을 첨부해드리지 못함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36) 본문 11절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시작된 바울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택하심이 제대로 작동을 하여 그 민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건가? 만약 그렇게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면, 그렇다면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 미래가 불확실한 것 아닌가? 그들 역시 언젠가는 구원의 자리에서 추락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본 대로 우선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 전부가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야곱의 후손 열두 지파에 속했다고 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 안에 있다고 해서 그들이 진짜 이스라엘인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난 수요일 말씀에서 진짜 ‘이스라엘’의 의미가 뭔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였고, 그럼 하나님을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건 역설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을 믿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의 이스라엘은 그런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민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그들이 다 참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합니다. 참 이스라엘 자체가 민족을 향한 호칭이 아닌 그와는 다른 공동체를 향한 것임을 바울은 전제로 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바울은 오늘 7절에,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낳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아버지라고 해서,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다, 사실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지요. 아브라함이 낳았는데 왜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 속에는 그렇지 않은 아들을 구별하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참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녀가 몇 명인지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네, 세 명의 여인(아내, 첩, 후처)에게서 총 여덟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제일 먼저 낳은 아들이 여종 하갈을 통해 여든 다섯에 얻은 이스마엘이지요. 그리고 본처인 사라를 통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이 이방인(미디안) 여인 ‘그두라’를 후처로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그두라를 통해 여섯 명의 자녀를 더 낳게 되는데요,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등이 그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노년으로 갈수록 더 건강했든가 봅니다.) 어쨌든 이 여덟 명의 아들이 다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난,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그들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이건 유대인들도 좋아할 내용이지요. 그 여덟 명의 자녀 중에 진짜 아브라함의 자녀,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할 때의 자녀는 이삭 한 사람뿐임을 유대인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삭과 나머지 일곱 명의 아들을 나누는 기준이 뭔가요? 이삭을 낳은 여인이 아브라함의 본처 사라이기 때문인가요? 그렇게 생각하는 유대인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바울은 약간 다르게 이야기하지요?(아브라함의 비정상적인 족보) 어떤 기준, 어떤 차이인가요? 네, ‘약속의 자녀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8절). 단지 어머니가 누구냐의 문제가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그 자녀를 (선택하여) 약속하고 낳은 자녀이냐, 아니면 그냥 ‘아브라함의 선택과 육체적인 능력’으로 인하여 낳은 자녀이냐, 하는 게 기준이자 차이입니다. 아시는 대로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았지만, 아브라함의 힘이 아닌 하나님이 언약의 힘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이 말은 여기에 아브라함의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에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단 한 명의 자녀도 없이 100여 년의 세월이 흘렀고, 둘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이름까지 직접 지어 주신 아들, 그리고 정확히 1년 후에 낳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바로 아브라함이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는 것이지요. 불가능해 보이는 뭔가를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걸 믿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고, 그걸 하나님은 유일한 ‘아브라함의 자녀’라 말씀하신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그러니까 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말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친아들, 뭐 이런 혈연적인 개념이 아니었던 겁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이 이런 바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많은 유대인들이 분명 맞장구를 쳤을 겁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우리가 바로 그 이삭의 후손이지 않느냐. 우리가 언제 이스마엘이나 미디안의 후손이었느냐? 우리야말로 정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그런데 왜 우리더러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것처럼 말하느냐?” 반문했을 겁니다. 이런 말이 지금 이야기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임을 여러분 아시겠지요? 그래서 그 반문에 더 제대로, 더 쉽게 답하기 위해 바울이 다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번에는 여러 아내가 아닌 단 한 명의 아내에게서 낳은 이삭의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 문제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바로 이삭의 아들인데요, 이삭은 오직 리브만을 아내로 하여 두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족장들 가운데 아주 예외적인 애처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삭과 리브가 역시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긴 세월 자녀가 생기지 않아 근심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리브가가 임신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리브가 태중의 태아가 둘이었고, 그 둘이 엄마의 자궁 안에서부터 서로 싸우는 겁니다. 얼마나 심하게 서로 다퉜는지는 모르겠지만, 산모가 그걸 두렵다고 느낄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두렵고 괴로워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하지요. 이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 이 말씀에 리브가가 안도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리브가를 위로하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지요? 어쨌든 이번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과 계획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둘이 아무 것도 이 땅에서 행한 것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신앙이 아예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 관하여 뭔가를 약속하셨습니다. 둘 중 큰 자, 형 에서가 작은 자이자 동생인 야곱을 섬기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장자의 몫을 동생이 차지하게 되어 그가 이삭의 자녀이자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서게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어떤 인간의 육체적인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약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유대인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이번에도 이렇게 오해하고 반발했을지 모릅니다. “그래, 누가 그걸 모르냐? 우리가 바로 그 야곱의 후손이다. 바로 우리가 이스라엘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여전히 바울이 이야기하려는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지요? 지금 바울은 혈통이나 조상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님을, 다른 기준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정하고 계셨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두 혈통처럼 무슨 아브라함, 이삭의 순수 혈통이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핵심은 뭔가요? 네,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셨고, 먼저 택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자손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이스라엘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누군가가 택함을 입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혈통이나 눈에 보이는 계보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보고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까? 오늘 읽은 본문에는 그 답이 보이지 않는데요, 사실 이어지는 14절부터 29절까지의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하나님이 직접 아브라함의 자손을 세우셨다는 것에 대한 누군가의 반론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약속하셔서 되는 거라면, 다 하나님 마음대로라면, 인간의 자유와 역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을 가정하고 바울이 답을 하는 거지요. 잠깐 이건 차치하고서 … 혈통이나 눈에 보이는 계보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보고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답은 9장 후반부(30~33절)에 나옵니다. … 간단히 말하면 그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느냐, 그리고 그 언약을 믿었느냐에 있습니다. 32절을 잠깐 보면,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여기 ‘돌’이 누구인가요? 네 예수님이지요.) 믿음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행위를 의지하느냐,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인지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 내용도 나중에 다시 설명합니다. 정리해보지요. [이스라엘이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실패한 것이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유대인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인 건 아니다. 그럼 그 중에 누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 진짜 이스라엘이냐?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은, 진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을 의지하는 자를 말한다. 나의 육체, 나의 힘, 나의 행위, 나의 의로움, 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려면 언약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언약도 믿지 못한다. 그들이 지금껏 믿는 척 해왔지만, 그래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척 하고 살아왔지만, 결정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님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지금 바울은 이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여러분은 참 이스라엘입니까? 아브라함과는 아무런 혈연의 관계가 없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습니까? 우리는 한민족이지만 이스라엘이 맞습니까? 이 질문은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되겠지요.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기 핵심은 ‘믿는 것’, 그리고 그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참으로 예수를 믿고, 그 믿음을 의지하여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중에서, 14절부터 29절까지의 내용, 앞서 예상되는 반론에 대한 대답으로 중간에 끼어들어가 있다고 말씀드린 이 부분은, 기독교의 유명한 한 가지 신학적 개념의 근거가 되는 곳입니다. 그게 뭔가요? 네 예정론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구원받을 자녀와 구원받지 못할 자녀를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길 것이라고 결정하신 것처럼,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갈지, 하나님이 미리 결정하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정론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용만 잘 이해해도, 그런 주장은 본문의 겉모습만을 생각한 결과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지금 바울의 이야기는, 참 이스라엘이 예정되었고 그걸 인간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제대로 설명하려니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택하심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왜 하나님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이 다 정해놓고,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택하시고 구원하시는가? 왜 예정처럼 보이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먼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믿게 하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그 이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을 바울이 지금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 답 역시 바울이 제시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조금 번역이 엉켜 있지만, 결국 이 말씀은,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처럼,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도 오직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됨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런 예정처럼 보이는 방법을 사용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는 걸 봐라,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 구원을 완성하시는지, 그 원리와 뜻이 잘 보일 것이다. 사람이 잘 하고, 못 하고의 기준이 있어서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았고, 1)오직 하나님이 불가능한 무언가를 약속하시고 그것을 누군가 믿고 받아들인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세우셨다. 2)또 그 선택이 항상 더 작은 자를 택하셔서, 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하심으로써, 믿음의 본질을 더 분명히 드러내셨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의 의지와 능력 이전에 먼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곧 은혜이며,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예수를 믿는 것도 결국 이러한 은혜와 믿음의 원리와 동일한 연장선에 있음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택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합니까?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다면 둘 중 누구입니까? 상대적으로 의로운 자와 죄 많은 사람 중에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약한 자, 죄 많은 자를 택하시지요. 여러분 성경의 에서와 야곱 중 누가 더 괜찮은 사람입니까? 에서는 정말 대장부 같은 사람입니다. 호탕하고, 거짓말이나 속이는 것도 할 줄 모르고, 아량도 넓은 그런 ‘큰 자’입니다. 반대로 야곱은 그 이름 그대로 이기적이고, 거짓말 잘하고, 비열하고, 사람 잘 속이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절대 지기는 싫어하는, 그런 성품의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까?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이 우리의 능력이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더 밝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강한 자를 버리고 약한 자만 구원하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렇게 택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의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한 것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한 이유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너무 작은 수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너무 작고 빈약한 민족이라, 또 비겁하고 불의하기 때문에 그들을 택하여 사랑하고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단지 ‘작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낸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의로워서이거나, 탁월해서가 아니라, 정반대로 그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택하심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뒤늦게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이라 칭함 받는 사람들을 세워가셨습니다. 이미 주변 나라들은 민족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고, 하나의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더 나아가 제국을 이루고 있던 그때 하나님은 고작 한 사람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한 종족, 한 민족을 이루는 것도 처음엔 너무나 천천히 너무나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축복은 거창했지만 자식 자체가 생기지 않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관련된 자녀들은 안 태어나고 관련이 없는 자녀만 잘 태어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미 세워진 한 나라를 택하지도 않고, 왜 이미 번성한 민족을 택하시지도 않는 겁니까? 왜 뒤늦게 한 사람을 택하여 하시는 말씀이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거라고 하시는 겁니까?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의지함으로 이루어짐을 더 밝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런 기준으로 누군가를 택하는 그것 자체가 불공평해 보인다면, 그러면 본문 14절부터 23절까지 읽으면 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하나도 불공평해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많은 것과 선택할 수 있는 적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도 그 정도의 자유와 주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나라, 그것은 자유와 평등이 있다는 이 세상보다도 훨씬 더 자유롭고 공평한 세상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는지요. 물론 이것 자체가 본문의 핵심은 아닙니다. 중요한 건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정해놓은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유가, 우리가 결단코 우리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자랑으로 삼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강함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온전한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세우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한 번도 스스로 강한 자가 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태생도 약한 자였고, 그들이 성장한 것도 이집트의 인큐베이터 안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젖을 먹고 커서 하나의 그럴듯한 민족이 됐습니다. 그것도 다른 민족에 비해 가장 늦게, 가장 천천히, 가장 폼 나지 않게 … 그렇게 하나의 민족, ‘이스라엘’이 되어 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언제 이스라엘이 가장 강한 자였습니까? 언제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다스렸습니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가장 약한 자였을 때,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할 때, 그 때뿐이었습니다. 그게 다윗의 때였지요. 어제 QT 본문이 다윗의 시, 시편 108편이었습니다. 거기 보면 시의 맨 앞에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1.하나님, 나는 내 마음을 정했습니다. 진실로 나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내가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렵니다. 내 영혼아, 깨어나라. 2.거문고야, 수금아, 깨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우련다. 3.주님, 내가 만민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드리며, 뭇 나라 가운데서 노래 불러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4.주님의 한결같은 그 사랑, 하늘보다 더 높고, 주님의 진실하심, 구름에까지 닿습니다. 5.하나님, 주님, 하늘보다 더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 온 땅 위에 떨치십시오.” 다윗은 새벽 같이 일어나서 이 시를 지었습니다. 시의 맥락을 보면 아마 너무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고, 그래서 잠이 안 왔거나, 너무 일찍 눈이 떠진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일인지는 시의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 다윗이 하나님께 뭐라고 합니까? 자신의 마음을 정했다고, 진실로 확실히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런 찬송도 있지요.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뭘 정했다는 겁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정했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해 또 악기들을 향해 선포하지요. “내 영혼아, 깨어나라. 거문고야, 수금아, 피아노야, 기타야, 내 목소리야 일어나라. 내가 새벽을 깨워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늘보다 더 높이 높임을 받으시고, 주님의 영광이 온 땅 위에 떨쳐질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다윗은 새벽 댓바람부터 자기 마음을 확정하고 확정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하는 걸까요?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의 고백이냐, 그게 중요한데요, 다윗이 이번만 그런 고백을 한 게 아닙니다. 시편 60편에도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거든요. 그런데 그 시편 60편을 보면 이런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다윗이 아람 나하라임과 아람소바와 싸우는 중에 요압이 돌아와 에돔을 소금 골짜기에서 쳐서 만 이천 명을 죽인 때에” 요압은 다윗의 가장 충직한 장수 중 하나지요, … 그런 그가 에돔을, 다시 말해 야곱의 형, 에서의 민족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후에 다윗이 그 찬송을 지어 불렀습니다. 다윗이 넘어지고 실패하여 마음을 확정한 게 아닙니다. 의지할 수 있는 게 하나님뿐이어서 찬송을 결정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충분히 이기고 있기 때문에, 찬송을 결정하고 그 마음을 확정해야 하는 겁니다. 충분히 부요하고 충분히 강하며 충분히 안전하고 충분히 승리하고 있고 충분히 더 잘 할 수 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기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정하기로 마음을 정한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시는지, 하나님이 누구와 함께 일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을 다스리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다스리던 때에 이스라엘이 왜 강한 자였다고요? 다윗과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가장 약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이스라엘’이었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진정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작정하고 작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작은 자를 선택하여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선택하여 의로운 자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선택하여 강한 자를 수치스럽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미련한 자를 선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폐하십니다. 하나님은 비천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선택하여 잘난 자들의 자랑을 소멸시키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을 구원하시고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이 메시지를 믿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의 기준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를 믿을 수 있고, 십자가를 믿을 수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너무 강한 자여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참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그들은 이미 충분히 의롭고, 충분히 강하며, 충분히 부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비단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지금 이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까? 로마도 마찬가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충분히 강하고 의로울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결단으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겸손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정으로 겸손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요? 왜 우리가 겸손하기 어렵습니까? 그건 절대 우리가 이유 없이 교만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제로 존귀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아름답고 존귀하게, 그리고 영화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 만든, 온 우주보다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으로 겸비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 예수를 따라가는 이들의 무리는 언제나 ‘적은 무리’이고 그 길은 늘 ‘좁은 길’입니다.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그 길을 갑니다. 나의 영광과 나의 존귀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이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습니다. 그럼 이미 존귀하고 이미 높아지고 이미 의로워진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다시 교만해지고 다시 의로워져서 믿음을 의지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별로 존귀하지 않음을, 우리가 별로 높지 않고, 우리가 결코 의롭지 않음을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고, 다시 내 의로움이 아닌 믿음을 의지하는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마 5:3)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결국은 폐하여지고, 부끄럽게 되는 지혜로운 자, 의로운 자, 강한 자, 부한 자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셔도 늘 십자가 앞으로 다시 돌아가,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그래서 결국 참 된 이스라엘로 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복된 삶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