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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2018년 2월 18일 주일 설교

2018-02-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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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8  사순절 첫 번째 주일 설교  ------------------------------------------------ 야고보서 1장 19~27절,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218.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순절 묵상 1) 본문 25절의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사순절(四旬節)이 시작이 되는데요, 여러분은 ‘사순절’ 하면 어떤 것들이 생각나시는지요? 사순절 하면, 보통 금식, 특별새벽기도, 고난주간, 이런 뭔가 좀 힘들고 고된 무언가들이 먼저 떠오르는데요, 실제로 초대교회 이후 오랫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지키며, 세 가지를 생각하고 묵상하며 실천해왔습니다. 그 세 가지가 바로, 기도와 금식과 구제입니다. 기도와 금식과 구제, 이 중에서 여러분은 뭐가 제일 힘드시나요? 다 힘든 것들이지요? 이 세 가지가 사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경건’이라는 말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요, 우리 27절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이 표현에 해당되는 새번역 성경의 표현이 바로 저희 이번 사순절의 표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이에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의 내용이 앞서 말씀드린 그 세 가지와 비슷하지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 구제와 연관이 되구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은 기도와 금식과 연관된, 좀 더 정확하게는 기도와 금식의 ‘목적’과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요,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살펴보기 전에 먼저 좀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야고보 사도가 경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앞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전제를 달았다는 거지요. 그냥 경건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일종의 조건을 달았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가 뭔가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경건’이라는 건, ‘사람 앞에서의 경건’과는 다른 경건이라는 뜻이지요. 또 정결한 경건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기가 참 그렇지만, 경건 중에는, 정결하지 못한, 더러운 경건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결하지 못한 경건, 참 모순적인 말이에요. ‘경건’이라는 말 자체의 뜻이 깨끗하다, 흠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러나 본문은 분명히 이 둘을 구분하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경건에 대해 말하고, 또 실천하려고 할 때, 그것이 정말 참된 경건,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고, 무엇보다 그 경건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긍정될 수 있는 경건인지, 아니면 단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만이 인정하는 경건일 뿐, 정작 하나님은 아무 관심도 없고, 받으시지도 않는, 그런 가짜 경건인지를 두렵고 떨림으로 분별해야만 합니다. 그 일례가 26절의 말씀에 있지요.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의 모양은 있어도, ‘헛것’이 되고마는 경건이 있는 거에요. 여기 ‘헛것’이라는 뜻의 헬라어가 ‘마타이오스’인데요, 그 뜻은, ‘가치 없는’, ‘쓸모없는’이라는 뜻이에요. 교회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 꾸준히 하고, 목사 되고, 직분 받고 해도, 그것이 다 헛것이 되어 가치 없고, 쓸모없이 되는 경건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어요. 그런 헛된 경건의 특징도 나오는데요, 역시 26절에, 어떤 경건이 가치 없는 경건인가요?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는 것, 자기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한 가지는 ‘생각’의 문제이고, 한 가지는 ‘습관’의 문제인데요, 먼저 ‘나는 경건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건하지 않다는 증거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경건은 무언가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도 아니고, 어떤 완성이 있는 뭔가도 아니며, 우리 인생에서 완료되는 무언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경건은 그냥 경건을 지향하는 ‘상태’에요. 경건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 ‘내 부족함을 깨닫고, 그 부족함을 채워가는 그 상태’를 성경은 경건이라고 하는 거에요.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생각과 함께, 경건에 대한 고민과 반성을 멈추는 순간, 그의 경건은 헛것이에요.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하고, 그의 신앙의 습관을 가졌는가, 그건 아주 작은 문제에요. 사람들이 우리의 겉을 보고, 신앙이 좋다고 칭찬해봐야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에요. 오늘 윷놀이 하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엔 다 ‘도찐개찐’이에요. 경건은 완성된 무엇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경건은 과정이에요. 나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스스로 삼가는 삶의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거에요. 탁월함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라는 말처럼요. 물론 ‘나는 부족하다’ 생각하는 그 자체가 경건이라는 뜻은 아니에요.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뭔가를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구원이라고 성경은 강조해요.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연약함과 완악함은 구별해야 돼요. 연약함을 방치하면 완악해져요. 당연히 그건 경건이 아니지요. (바울의 고백,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랑하는 우리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잘 비추어 보고, 주님을 의지하며 그것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노력 중에서 꼭 필요한 한 가지가 26절에 두 번째 내용인데요, 바로 자기 혀를 재갈 물리는 것‘이에요. 경건의 핵심이 절제이고, 그 절제의 핵심이 언어의 절제, 말의 절제임을 성경은 강조해요.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또 그 이후에도, 우리가 제일 먼저 신경 써야 할 경건은, 우리의 ’언어의 절제‘에요. 이에 대해 야고보 사도는, 자기 혀를 재갈 물려야 한다고 말해요. 마치 힘센 소나 말을 제어하고 부리려고 하면 그 입에 굴레를 씌우고 재갈을 물리듯이, 사람의 혀도 그게 필요해요. 그만큼 우리의 혀는 힘이 세고, 통제가 어렵기 때문인 거죠. 인간은 혀를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화를 아예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19절에 보면, 대화를 하되, 듣는 걸 먼저, 더 속히 하고, 말하는 건 나중에, 천천히 하라는 거에요. 말은 쉽지만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의 언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실수와 문제를 반복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내가 뱉어낸 말로 인해 우리 자신이 그 언어의 노예가 되어,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에 머물게 되기도 합니다. 이번 설 같은 명절에 더 그런 일들이 많이 생기지요. 괜히 말해서, 그냥 듣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우리에게 참 많지요.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나중에 3장에 보면, 이 부분에 대해 야고보 사도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 혀를 길들이는 일이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된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도우심이 필요해요. 만약 여러분이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뭔가 경건의 훈련을 하겠다고 결심하신다면, 먼저 여러분의 혀를 재갈 물리는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힘든 싸움이지만, 성경은 우리의 말과 언어를 다스리는 것을, 경건의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는 덕목으로 강조합니다.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의 언어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다스림 가운데 놓여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아울러 야고보 사도가 본문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경건의 모습은, 22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요, 아시는 대로 야고보서의 주제 자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지요. 본문 역시 그러한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해 강조하는데요, 22절에 보면,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는 구절도 나오고, 25절에도,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자가 되라.”고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요 본문을 잘 살펴보면, 말씀을 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데요, 그게 뭔가요? 네,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에서 순종의 성패가 가려져요. 본문 21절을 보면, 말씀을 어떻게 받으라고 하지요? 네,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나서 22절에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지요. 25절도 보면,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다.”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 실천한다, 이 둘이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사실 시간적으로는 구분이 됩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 행함이라는 것은 실상 말씀을 듣는 데부터 실제적으로 시작된다고 야고보 사도는 강조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그 뒤에 행함이 결정된다는 뜻이에요. 들음과 행함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들음 그 자체가 행함의 순종을 결정한다는 입장인 거에요. 21절 마지막에 있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명령을 잘 살펴보세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조금 이상한 표현 아닌가요? 여러분, 마음에 말씀이 심어졌어요, 그런데 다시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해요. 마음에 심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나요? 네, 이미 말씀을 듣고 받아서, 마음에 담았다는 거에요. 여기 ‘심어진’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치과에서 사용하는 그 ‘implanted’라는 단어에요. 아예 마음에 말씀이 꽉 심겨졌어요. 이미 들은 거에요.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그런 말씀을 다시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해요. 무슨 뜻인가요? 두 번 들으라는 거에요. 두 번 받아들이라는 거에요. 그 두 번 들음에서 행함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들어야 두 번 듣는 거에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뜻이 뭐에요? 부드럽게, 겸손하게 받는다? ‘아멘’으로 받는다? 이런 뜻인가요? 여러분 사실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여러분의 ‘아멘!’이라는 말이 정말 큰 힘이 돼요. 설교가 잘 준비되지 못한 경우에도, 성도들이 힘껏 ‘아멘!’이라고 말하면 설교자는 완전히 딴 사람이 돼요. 반대로 아무리 말씀을 잘 준비했다고 해도, 성도들의 리액션이 없으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에요. 그러나 ‘아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큰 소리로 ‘아멘’하는 것이 온유하게 받는 걸 뜻하지 않아요. 여러분, 25절을 보세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다.”라는 말씀 구절을 잘 생각해보세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여러분, 율법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나요, 아니면 자유를 제한하나요? 네, 율법이란 기본적으로 사람을 제한해요. 거짓말하지 말라, 하면 사람의 언어의 자유가 제한돼요. 그런데 왜 야고보 사도는 율법이 자유롭게 하는 거라고 말할까요? 그리고 그런 율법일 때, ‘온전한 율법’이라고 말할까요? 이 부분은 앞으로 함께 나누게 될 건데요… 우선 여기 ‘들여다보다’라는 구절에 밑줄을 좀 그어보세요. ‘들여다보다’라는 단어, ‘파라쿱토’는 보기는 보는데, ‘골똘히 생각하며 바라보는 것’을 뜻해요. 원래 이 단어는 ‘뭔가를 잘 살펴보기 위해서 허리를 굽혀서 가까이 다가가 보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였는데요, 예컨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그 무덤 안을 들여다볼 때, 이 단어를 사용한 거에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그 무덤 안에 시신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베드로가 이제 무덤 속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어떻게 보겠어요? 그냥 슥, 보고 마는 게 아닐 거에요. 천천히, 조심하면서, 정말 주님의 시신이 없나, 자세히 살펴봤겠지요? 그런 모습에서 이 단어가 유래해서, 결국 뭔가를 세심하게,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을 의미하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율법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하며’ 율법을 보는 거에요.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태도로 말씀을 읽을 때,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부드럽고 겸손하게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그냥 덮어놓고 ‘아멘!’을 외치며 받는 걸 뜻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말씀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그냥 스쳐지나가듯, 대충 보는 거에요. 아니 아예 눈을 감고 보는 거에요.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볼 때, 제목만 슥 읽는 거 있지요?(glance) 그런 거에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덮어놓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성경은 그걸 온유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온유함은 정반대에요. 생각하고 의심하고 따져보고 그렇게 말씀을 받는 것을 의미해요.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의 밭이 갈아엎어져요. 그래서 말씀이 내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와 마음속에 단단히 심겨져요. 내 마음이 온유해지는 것은 그 말씀을 잘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져요. 이걸 마음의 기경(起耕), ‘밭갈이’라고 해요. 묵은 밭을 갈아엎는 거지요. 생각 없이 그냥 살다가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우리의 마음을 갈아엎는 것, 그게 바로 말씀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에요.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에 대해 다시 생각한 거에요. 들여다본 거지요. 그냥 바리새인들처럼 무조건 율법대로 순종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 율법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한 거에요. 예수님이 실제로 그렇게 하셨잖아요. 안식일인데 제자들이 배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고 있는 걸 사람들이 보고 왜 율법을 어기냐고 말했을 때, 주님이 율법을 들여다보시고 풀어 설명해주시잖아요. 그 결과가 25절인 거에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 말이에요.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을 들여다보게 되면서, 율법이란 사람을 얽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야고보서가 기록된 거지요. “믿음은 행함과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여다볼 때 믿음이 생기는데, 말씀을 들여다보면 거기서 순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의 마음은, 이렇게 ‘생각’함으로 온유해진 거에요. “경건은 다 똑같은 게 아니다. 하나님 앞에는 더러운 경건도 있고, 깨끗한 경건도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이것도 생각했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요. 생각하지 않고 말씀을 받는 것, 그냥 덮어놓고 ‘아멘!’이라고 말씀을 받는 것에는 실천의 힘이 없어요. 고민하고 생각해서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았을 때, 그 말씀이 정말 내 이성과 판단에 합치되었을 때, 그때 사람은 실천하기 시작해요. 그게 마음을 기경하는 것이고, 그때 우리는 비로소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게 돼요. 왜 말씀을 듣고도 우리에게 순종이 뒤따르지 않나요? 말씀을 ‘생각’하지 않고 들었기 때문이에요. 잘 들어서, 잘 생각해서, 그렇게 말씀이 심겨지면, 그때 우리는 순종할 수 있어요. 물론 그 과정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생각함으로 말씀을 온유하게 받아들여도, 그래도 순종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 과정이 반복되면 결국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되고, 그때부터는 순종의 힘 자체를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생각함으로 받았고, 그래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면, 그때는 정말 순종하려고 애써야 돼요. 생각했지만 와 닿지도 않고, 감동도 없는 말씀에는 순종의 우선순위를 두지 마세요. 일단 생각한 말씀에 순종하세요. 생각 없이 들은 말씀, 순종, 그건 형식적인 신앙이 될 가능성이 너무 높아요. 일단 내 마음이 부드러워진 그 말씀, 거기에 순종하려고 애쓰세요. 그러면 나중에는 내가 잘 동의되지 않고, 납득이 가지 않는 말씀도 순종할 힘이 생기는 때가 와요. 한국 기독교는 이 생각의 힘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어요. 생각하는 신앙, 의심하고 고민하는 신앙을 너무 많이 포기해버렸어요. 그 결과 오늘날 이 모습이 된 거에요. 이상한 일이지만, 생각하며 말씀을 들으면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해져요. 생각하고 의심하면 믿음이 없어질 것 같지만 정반대에요.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순종의 힘이 없어요. 여러분, 주중에 바울이 베뢰아라는 도시에서 전도한 내용을 묵상했잖아요? 그때 이런 구절이 있지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다는 사도행전 17:11의 말씀이에요. 마음이 너그럽다, 새번역은 ‘고상하다’라고 번역했는데요, 이게 무슨 뜻인가요? 마음이 너그러우면 보통 생각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 것, 이렇게 보기 쉽지만,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그렇게 받지 않았어요. 오히려 정반대에요.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어요. 정말 그런가, 바울이 전하는 설교 말씀이 정말 성경과 맞는가, 따지고 되묻고 그렇게 말씀을 ‘상고’했어요. ‘상고하다’는 동사는 영어로 ‘examine’이에요. 조사하고 검사하듯 그렇게 성경을 본 거에요. 오늘 본문의 무슨 단어랑 연결되나요? 네, ‘들여다보는’ 거에요. 그 결과가 뭔가요? 따지면서 말씀을 보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적었나요? 믿음이 안 생겼나요? 아니에요, 성경은, 그래서 오히려 더 믿는 사람이 많아졌고, 많은 그리스의 귀족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어요. 상고하면, 믿음이 생겨요. 따지고, 의문을 가지고 말씀을 읽어야 마음이 온유해져요. 그래야만 비로소 그 말씀에 순종할 힘이 생겨요. 왜 말씀을 들어도 순종하지 못한다고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말씀이 내 마음에 머물지를 않게 되는 거에요.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중에 존 캅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신앙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는 (주일에) 교회 주차장에 차를 파킹하면서 뇌까지 파킹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는 감정으로만 받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마음의 감동에 조심하세요. 생각 없이 그냥 눈물 나는 감동, 아무 변화도 우리의 삶에 일으키지 못하는 감동, 여러분 그런 감동에 조심하세요.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실 때, 눈물 흘리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성경에서 본 적 있으세요? 없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정에 호소하신 게 아니에요. 마음이 시원해지는 그런 은혜, 여러분 조심하세요. 그건 우리의 마음을 ‘기경’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의심과 따져 물음의 힘, 말씀에는 그게 필요해요. 말씀이 곧 로고스이고, 그 로고스가 바로 우리의 이성 가운데 있어요. 순종은 중요해요. 순종이 제사보다 중요해요. 그런데 순종보다 중요한 건 ‘생각’하는 거에요. 왜냐면 순종이 거기서 시작되거든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순종해버린 것들이 결국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어요. 그리고 행함 없는 믿음을 계속 생산해내요. 야고보 사도는 ‘생각하는 사도’였던 거에요. 경건이 뭘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도와 금식과 구제가 뭘까,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걸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신데, 어째서 율법으로 우리를 얽매실까? 왜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을까? 야고보 사도의 그 생각과 고민이, 결국 행함 있는 믿음이라는 가장 귀한 복음의 본질을 꿰뚫게 한 거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생각하시기를 바래요. 그냥 주님의 고난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 없는 눈물을 쥐어짜지 말고, 더 차갑고 냉정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그러므로 …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그 말씀이 우리의 푯대가 되기를 원해요. 저와 여러분의 이번 사순절이 ‘생각’하는 기간,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고 온유하게 하는 시간,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행함과 분리되지 않는 그런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그 ‘생각’의 결과들에 대해, 특별히 자유롭게 하는 율법에 대해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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