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2018년 1월 7일 주일 설교
2018-01-0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80107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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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장 14~2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8010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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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주제 말씀 설교 #2.) 지난 주일에 이어 계속해서 2018년 주제 말씀에 대한 강해를 이어갑니다. 본문 22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올 한 해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온전히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 본문을 함께 상고하면서, 주님은 우리를 개별자가 아니라 ‘우리’라는 모습, 교회라는 공동체로 함께 부르셔서, 그 교회를 통해 우리 각자가 또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 가는 방식으로 우리를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심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건축 비법이었지요. 또한 그 건축은 하나님이 설계하시고, 성령이 만들어 가시고,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주춧돌이 되시는, 그렇게 세 분 하나님의 시너지 속에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건축이기도 했습니다.
이 건축의 목적은 분명하지요. 무엇을 짓기 위함이고, 어떤 모습을 만들기 위함입니까? 22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어디에, 어떤 모습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이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요즘 트럼프 대통령의 이상한 이야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또 한 번 긴장감이 돌고 있는데요,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거하시나요? 또 어떤 모습 속에 거하시나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러저러한 매매를 일삼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주님은 하나님의 처소에 대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규정하셨습니다(막11:7). 이 구절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또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처소는, 모든 인간의 경계와 차별을 넘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라고, 주님은 성전에 관한 하나의 중요한 정의를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18:19). 우리 중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면, 즉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로서 드리는 기도가, 곧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함’에 대해 주님은 곧바로 그 다음절에서 이렇게 강조하시지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 예수를 나의 그리스도,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자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하는 그 자리에, 주님은 계시며 또한 응답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의 자리, 거기가 바로 주님의 처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가 올 한 해 서로의 기도 제목을 나눴는데요, 주중에 제가 어떤 한 지체가 교회에 오자마자 그 기도 제목을 보면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걸 보는 제 마음이 너무 뜨겁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그렇게 기도하는 자리가 곧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예배당이, 우리 교회가, 서로를 위해, 그리고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또 새롭게 지어지는 여러분의 순(筍)들이 서로를 기도로 섬기는 주의 집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건축 과정에 있어서,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중요한데, 그 말을 하면서 바울은 그 전제가 되는 하나의 수식어를 계속 덧붙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특히 마지막 두 절에서 자주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데요, 여러분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겠는지요?(*)
네, 바로 ‘~ 안에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주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등등,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2장에만 무려 10번(6, 7, 10, 13, 15, 18, 21, 22절 등) 넘게 같은 표현이 나오고, 에베소서 안에는 40번 정도가 나옵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이건 좀 뭔가 어색하다’ 싶은 표현들을 보게 되는 것도, 이 표현이 너무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글짓기 평가 같은 걸 하면 별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에서 이 표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 바로 이 에베소서입니다. 거의 에베소서의 습관성 단어라고 할 만큼 자주 ‘그리스도(성령, 하나님) 안에서’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 표현이 많이 나오는 책이 로마서인데요, 그러고 보면, 이 표현이야말로 복음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바울은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계속 반복되지만, 그 중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최초가 되는 ‘안에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만드신 바’라는 말이 예술적 작품을 의미하는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인데요,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예술적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겠고, 그것을 인정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창조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연합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처럼,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갑니다.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고 있다는 말의 실제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의 가장 완전한 주석이 주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속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5장 한 번 찾아보실까요?(신약성경 174쪽) … 여기 요한복음 15장은 너무나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이지요. 5절을 보시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9절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내 안에 거하라고. 그런데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간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함께 지어져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요 다시 이 9절을 보면, 정작 주님은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가 이제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림이 그려지시지요?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누리고 계신 주님이 이제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초청하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함께 빚어 가십니다.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그 사랑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집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그 사랑을 충분히 누린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 안으로 누군가를 초청하고, 그를 사랑으로 품어 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사랑을 풍성하게 주고받는 겁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10절, 12절, 17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강조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누려서, 아니 아예 그 사랑에 잠겨서, 그 속에서,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그 사랑으로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 그 이상의 뭔가를 할 수도 없고, 또 그 외의 다른 사랑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의 교회’를 이루려 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루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 그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주님은 여러 방면에서 이런 방식의 표현,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러저러하게 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이러저러한다, 하는 표현을 자주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요15:9)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6:57) 즉, 주님이 ‘임의로 또는 억지로’ 뭔가를 하시는 게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아버지를 통해 받은 뭔가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하고 계심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면 됩니다. 우리의 언어에도 같은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 같이 나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언어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모습처럼, 자연스럽고 또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이루며 행해야 하는 사랑은, 내가 받지도 않은 것을, 내가 누리지도 못하는 것을, 억지로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만큼, 내가 느끼고 아는 만큼, 그만큼만 사랑하고 베풀면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되고, 또한 천국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없다면 당연히 안 해도 됩니다. 적게 사랑을 느낀다면 그만큼만 하면 됩니다. 반대로 내가 많이 받았다면, 그렇게 느끼고 누린다면, 받은 그만큼 충분히 하면 됩니다. 사람들 눈치 보며 적당히, 남들과 비슷하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받은 만큼 충분히, 넉넉히 사랑하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는 가볍고 쉽습니다. 의무나 억지가 아닙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대로 그렇게 사랑하고 섬기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받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사랑합니까? 참 놀라운 것이 사랑은 본래 받아야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는 거지요. 또 받으면 언젠가 주게 되는 것도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채워지면, 그게 흘러넘쳐 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기려 하니까 기쁨도 없고, 감동도 없습니다. 주의 사랑 안에 머무는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또 받기는 엄청 받았는데, 그만큼 베풀지 않으니까, 그 사랑이 흘러가지 못하고 고인 채 신앙을 이상하게 만듭니다. 둘 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모습,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이 주신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베풀면 됩니다.
주님이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시려 할 때, 베드로가 그런 주님을 완강히 거절하지요. 사실 유대인 사회에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거든요. 남의 발을 씻어준다? 이건 유대인들끼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일입니다. 설사 그가 노예라 할지라도 유대인은 같은 유대인 상전의 발을 씻겨주지 않습니다. 그만큼 그 일은 사회적으로도, 또 율법적으로도 천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청결이 가능해지고, 또 밥도 먹을 수 있는데, 그 공동체에는, 그 자리에는 그런 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주님이 먼저 하십니다.
당연히 베드로가 거절합니다. “(주님은)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펄쩍 뜁니다. ‘절대로’ 안 된 답니다. 나는 못해도, 주님 역시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상관이 없다는 말은, 남남이라 하는 겁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이라는 거지요. 오늘 에베소서 본문 19절에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식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관계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외인’(19절)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에게는 너무 서운한 말이지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이 얼마입니까? 꼬박 3년을 말 그대로 동고동락했습니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살았습니다. 3년을 말입니다. 신앙, 뭐 이런 거 다 떠나서도 3년의 세월을 24시간 함께 했다면, 그건 가족 이상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깟 발 한 번 못 씻게 했다고, 서로 남남이라 하십니다. 너무 극단적이고,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과 베드로의 그 관계가 본래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고 누리는 거기서 주님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주님 주시는 사랑을 기꺼이 받으면 되고, 괜히 나의 죄책감이나 의로움이나 영웅심 때문에 그 사랑을 거절하면 안 됩니다. 받아야만 주님과 상관이 생깁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야만, 받을 수 있어야만 주의 제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게 먼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존재’요, ‘빈털터리’임을 아는 것이 믿음이고,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는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믿음’이지요. 여러분은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은혜만큼, 믿는 만큼 다른 이들에게 하시면 됩니다. 모든 거룩함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이 하루는 주님을 배척하는 부류인 바리새인의 식사 초청을 받았습니다. 대단히 드문 일이지요. 그런데 주님이 마다하지 않고 그 시몬이라는 이름의 바리새인 집에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식사를 하려고 하는 찰나, 그 동네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잘 알려진 한 여인이 주님을 찾아옵니다. 당시에 여인을 향해 ‘죄인’[ἁμαρτωλός]이라 하면, 보통은 매춘부로 살아가는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런 여인이 바리새인의 집에 주님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집에 조용히 찾아온 겁니다. (아마도 몇 절 뒤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일 겁니다.)
보통 같으면 문전박대를 당했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주님께만 향하고 있어서였는지, 그날은 아무 제지 없이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당시 사람들이 잔치자리에서 먹는 자세, 반쯤 누운 그 식사 자세로 앉아 계셨는데요, 그때 그 여인이 주님 계신 곳으로 다가오더니 갑자기 주님의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 눈물이 얼마나 절절했던지,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그 눈물을 발 씻는 물 삼아,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릴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바리새인의 집에 죄인이 들어오다니. 그리고 그 부정한 몸으로 랍비의 몸에 손을 대어 똑같이 부정하게 만들다니…. 그리고 랍비라는 사람은 그것을 제지하지도 않다니…. 사람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의 연속 앞에서 그저 멍 하니 주님과 여인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여인이 주님의 발 씻기를 다한 후에, 그 발에 입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 문장에서 동사는 ‘미완료’(과거 진행)가 쓰입니다. 간절한 키스가 연이어 주님의 발에 닿은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이 담겨 있는 향유를 주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그 향유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 여인의 아픔과 눈물과 수치와 죄악이 녹아 있는 그 향유를, 주님은 기꺼이 받으셨고, 순식간에 바리새인의 집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히 채워집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께 항변하지요. 예수님이 만약 선지자였다면 이 여인이 누구인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녀가 만지고 닦도록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어떤 사채업자에게 빚진 사람이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약 5천만 원)을 빚지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약 5백만 원)을 빚졌다. 둘이 다 갚을 길이 없는 딱한 처지였는데, 사채업자는 둘 모두의 빚을 다 없애주기로 했다. 그러면 (시몬아)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 사채업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합니다.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5백 데나리온이라는 말 대신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러자 주님은, “그래,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신 뒤, 몸을 그 여인에게로 돌아서신 채로, 계속 시몬에게 말씀하시지요.
“(시몬아) 이 여인을 봐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도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도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쏟아 부었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은 것이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진 사랑의 가장 밑바닥에 주님 주신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시몬에게 질문하시기를, “(탕감 받은) 그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그 사채업자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둘 중에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 하는 말이 더 어울리지만, 굳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십니다. 여기 쓰인 단어가 ‘아가파오’[ἀγαπάω], 곧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 주님의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랑과 탕감, 용서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로, 이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그렇게 교회로 함께 지어져갈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의 실력이나, 인격이나, 사랑으로 하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너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합니다. 여러분,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만큼 사랑하고 섬기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무겁지 않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사랑의 감동이 있는 분이면 섬기고, 사랑하십시오. 다만 온전히, 주님처럼 사랑하십시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기준, 사랑의 내용으로 사랑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이 받아 감사한 만큼 충분히 그리고 넉넉하게 사랑하십시오.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거나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의 기준은 남의 태도나 반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받고 깨달은 사랑에서 나옴을 잊지 마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나와 다른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하지 않느냐?” 이런 말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입니다. 향유를 부은 그 여인은, “내 옥합 깼으니 너희도 너희 옥합을 깨라!”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하니까 너도 해라, 이건 주님의 교회를 이루는 마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받은 사랑 안에서, 주님 주신 그 사랑의 방법으로, 끝까지 사랑하고 끝까지 기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여러분의 섬김과 사랑을 받는 누군가가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자신의 인격이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인격이나 실력을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 대단하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흘러가지 않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향유를 부은 우리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남을 섬기고, 교회를 섬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해 섬기고 사랑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선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다고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인격을 칭찬하고 그의 신앙을 높이 평가하는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를 통해 그를 그렇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 단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며, 내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를 고백하는 삶, 그것은 단지 나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과는 다른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오늘 새롭게 세워진 순장님들, 또 재정 위원님들, 오늘 말씀에 가득히 기록된 ‘하나님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이 말을 늘 기억하십시오. 결코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실력 안에서가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함께 주님의 집으로 지어져 갑니다. 부디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누리시고 맛보시기를, 더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 주의 몸 된 지체에게로 흘려보내십시오. 주님은 부활하여 아버지 옆에 계시고, 이제 우리는 서로를 통해 주님의 몸을 만지고 확인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주께 부을 향유를 지체들에게 부어주시고, 주께 고백할 사랑을, 또한 지체들에게 고백하십시오. 그것을 잘 드리고, 또 잘 받는 그 모습 안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 주님의 교회로 빚어져 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