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017년 12월 31일 주일 설교

2017-12-3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1231  성탄절 후 첫 번째 주일 예배 설교  ------------------------------------------------------- 에베소서 2장 11~22절, 함께 지어어져 가느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1231.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2018년 주제 말씀 설교) (오늘 읽은 본문, 에베소서 2장은 2018년 주제 말씀 본문이기도 한데요) 본문 22절의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2018년 한 해 동안)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여러분 시너지(synergy)라는 말 잘 아시지요? 보통은 ‘시너지 효과’라고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쉽게 말해서 1+1›2가 되는 연합의 효과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시너지 효과’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 그것을 실제 우리의 삶이나 가정, 또 공동체나 사회에서 자주 경험하게 되시는지요?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수학의 법칙을 뛰어넘어야 하는 어려운 일이 시너지입니다. 시너지는커녕 그냥 1+1=2가 되는 정도의 연합만 되어도 훌륭한 공동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학자들이 연구를 해 보니, 보통은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루게 되면, 거기 속한 한 개인이 발휘하는 역량이나 공헌도는, 공동체가 성장함에 따라 오히려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독일 심리학자 링겔만이라는 사람이 줄다리기를 통해 실험을 해봤는데요, 한 사람이 당길 수 있는 힘의 크기가 100이라고 하면, 두 명이 함께 당기면 200, 세 명이면 300이 되고, 또 서로 응원하고 격려하면서 더 큰 힘을 내서, 210, 320 …, 이렇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각 개인이 발휘하는 힘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됨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실험에 따르면, 2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이면 잠재적인 기대치의 93, 3명일 땐 85, 그리고 8명이 넘어가면 아예 절반 이하의 힘의 크기(49)만 나타나는 것으로 나온 겁니다. 혼자서 일할 때보다 집단 속에서 함께 일할 때 보통 사람은 노력을 덜 기울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링겔만 효과 [Ringelmann effect]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모여서 뭔가를 할 때의 더 큰 문제는, 단지 물리적인 힘이나 양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어떤 가치나 질적 차원에서 생겨납니다. 한 개인으로 있을 때 나타나지 않던 비인간적이고 부도덕한 모습들이, 일단 그룹이 되고 나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수많은 역사의 비극이 이런 집단적인 광기로부터 시작되었지요. 혼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부정한 일들도, 함께 하게 되면 양심의 큰 저항 없이 해내게 됩니다. 남들 다 하니까 죄책감 없이 나도 따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고, 더 나아가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해관계로 인해 힘없는 소수를 희생시켜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집단적 이기심이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일본의 석학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학자는, “공동체는 타락과 변질의 결과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얼핏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그러면 뭔가 좋은 일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 같지만, 현실은 결코 그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시너지는커녕 관계 때문에 오히려 신앙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목회를 해 보니, 신앙의 어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성도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라는 건 처음부터 큰 위험과 도전을 안고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강조되는 것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처음부터 공동체로 부르셨고, 우리가 함께 교회로 지어져 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만큼 연합과 모임과 교제를 강조하는 종교도 드뭅니다. 개인의 영성, 묵상, 사색 등 개인적인 수행만큼, 또 그 이상으로, 기독교는 성도의 교제와 연합을 훨씬 더 강조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날마다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서로의 가정에서 삶을 나누기 위해 노력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고(행2:46), 실제로 예수님은 성령을 기다리라는 마지막 당부와 함께, 따로 떨어져 있지 말고, 꼭 예루살렘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다릴 것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유대인들과 로마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던 때여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주님의 약속대로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임재 하셨습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은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모여 있던 거기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졌습니다. 우리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의 주제는 선교이고, 선교란 복음을 들고 흩어지는 것이지만, 그 선교는 역설적이게도 한 곳에 성도들이 모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흩어지기 위해 모이고, 더 멀리 선교하기 위해 더 가까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삼위일체, 즉 공동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종교이니, 공동체와 함께 모이는 일의 신학적 중요성과 절대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여러 성도가 모여 교회가 되었을 때의 어려움과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작은 공동체만 되어도 그 안에서 편이 갈리고, 파벌이 생깁니다. 또 공동체가 커지면, 거기서 생겨난 힘에 의해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이는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도 있던 일이었습니다. 함께 모이면 뭔가 더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하는데, 실상은 혼자일 때보다도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성도 개개인이 그 힘든 것들을 참고 견뎌야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예수를 믿는 신앙은 가지고 있어도 교회는 다니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저희처럼 서로 다 알고 교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은 교회가 아니라, 함께 모여 예배만 드리고 흩어지는, 보다 큰 규모의 교회를 더 선호하지요. 저는 지금 어느 교회가 더 좋은가, 나쁜가를 평가하려 함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처럼,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함께 자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획한 대로 교회가 세워져가고 있는가, 저는 그것을 묻고 싶은 겁니다. 교회에는 그것이 이 땅에 세워질 때부터 있었던, 하나의 대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주님이 세우시는’, ‘주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그 믿음의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주님의 교회를 주님이 직접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I will build My church.”). 내 교회를 내가 세운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교회에 대한 유일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교회를 선택해야 하고 또 그 선택을 위한 나름의 이유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과 목적, 또 좋은 교회의 기준은 사실, 우리 안에서 결정되고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를 세우신 주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교회란 처음부터 주님의 교회임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신 한 여자 강사분이, 강의 중에 당신이 대학 다니며 돈을 번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요, 처음에는 그분이 햄버거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도저히 돈이 안 모아져서, 전공인 음악을 살려 피아노 강사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런데 피아노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보니까 그것도 역시 돈이 너무 안 모아지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나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개인 레슨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지방에서 올라온 그분은 주변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그것도 잘 안 되더랍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해서 얻은 결론이, 큰 교회를 나가는 거였다고 합니다. 큰 교회를 가서 거기 권사님, 집사님들 눈에 자꾸 들도록 예배와 봉사에 열심히 참여했답니다. 그렇게 성도들의 눈도장을 찍고 나서, 결정적으로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아이들과 친해졌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의 마음까지 얻었을 때 그분이 아이들한테 그랬대요. “너는 손이 너무 가늘고 예뻐서 꼭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 엄마한테 가서 나 너무 피아노 배우고 싶다고 꼭 이야기해라.” 아니나 다를까 교회 권사님, 집사님들로부터 연락이 조금씩 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어지간한 직장인보다도 훨씬 더 돈을 많이 벌게 됐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를 옮기실 생각이 생기시는지요? ^^) 여러분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좋은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이 계획하고 주님이 세우셔서, 주님의 목적을 이루는, ‘주님의 교회’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대전제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주장할 수 없고, 주님과 무관한 내 기준으로 교회를 선택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이 우리를 하나의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가 되었고, 주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교회로서 세워져갈 따름입니다. 본문은 교회를 하나의 건축물로 비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건물의 주춧돌(모퉁잇돌)이고, 저와 여러분 모두가 각각의 벽돌이라 합니다. 내가 왜 돌 하나밖에 안 되냐, 아쉬워하실 것 없는 게, 예수님도 하나의 돌이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예수가 계셔서 우리와 함께 교회가 되어 가십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중요한 건 우리는 ‘지어져 가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의 마지막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함께 건축하다’라는 뜻의 [συνοικοδομέω]의 복수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함께 지음을 당하여’ 교회가 되어 갑니다. 당연히 그것을 지으시고, 만드시는 건축가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짓는 게 아니라 지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건축이 완료된 하나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지어져 가는’ 진행형의 일입니다. 그 모든 전체 디자인을 성부 하나님이 하십니다. 고백교회를 어떻게 빚어갈 것인가, 그 청사진과 설계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설계도대로 실제 그 건물을 짓는 건축가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거룩한 돌들을, 필요한 곳에 가져다 사랑으로 연결하여 주님의 교회를 건축하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여기 22절을 보면, 하나의 절 속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함께 등장하시지요.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연합하여 일하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실 성경 전체에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이 한 절에 다 등장하는 구절은 거의 없습니다(축도와 세례). 교회를 향한 말씀 속에 이런 표현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가 성전으로 지어져 갑니다. 그것이 교회이고, 주님의 몸 된 공동체입니다. 고백교회가 그렇게 지금도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건축가가 있다는 것은 돌들이 그냥 모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돌들이 대충 모여 있기만 한다고 해서 집이나 건축물이 되지는 않지요. 돌무더기가 아니라 집이 되려면, 좋은 설계도와 훌륭한 건축가가 필요합니다. 돌이 건축가를 자처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22a). 제가 예전에 라디오에서 어떤 분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유명해진 이야기라 여러분 중에서도 아시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등산을 무척 좋아하는 한 남자가 이른 아침에 산에 올라가는데, 한참 오르다보니 화장실이 급한 겁니다. 산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할까 하다가, 급한데 너무 멀기도 하고, 또 인적이 드문 이른 시간이기도 해서, 그냥 등산로 옆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냥 일을 봤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무사히 일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려니까 좀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큰 돌 몇 개를 가져다가, 그 자리를 덮어서, 거기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게 잘 가려두고 갔습니다. 그렇게 등산을 잘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중에 이 분이 다시 그 산에 오르다가 놀라운 광경을 본 겁니다. 자기가 용변을 덮어 놓기 위해 쌓은 돌들 위에 사람들이 계속 돌들을 쌓아 올려놓아서, 이젠 거기 아예 큰 탑이 하나 만들어져 있는 겁니다. 참 신기하다, 하고 혼자 웃고 넘어갔는데, 다음에 또 등산을 하면서 보니, 이젠 그 탑 앞에 아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서 있더랍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차례가 된 사람들이 그 돌탑 앞에 서서 합장을 하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그저 탑이 높이 쌓여 있어 뭔가 영험해 보이고, 또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 줄 알고, 어느새 등산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오래 전 들은 이 이야기가 떠올랐을 때, 저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교회가 그럴 수 있겠구나. 그냥 많은 돌들이 쌓여 있다고 해서,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찾아가고, 또 거기서 뭔가를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주님의 교회는 아니구나. 그 안에 주님이 계시느냐, 주님이 친히 지어가고 계시냐, 또 주님이 거하실 수 있는 거룩함을 가지고 있느냐, 그것이 교회의 ‘교회 됨’을 결정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고백교회를 이루어가고, 그럼으로써 우리 각자가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갈 때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교회, 또 사람들이 좋아 보인다고 인정해주는 그런 교회의 모습을 우선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가 편하고, 나에게 좋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거하시기에 편하고 좋은, 주님의 처소가 되어가고 있는지, 우리는 늘 말씀에 비추어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목사가 주춧돌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교회가 세워지지 않도록, 여러분이 주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성경은 절대로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기초가 목사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때론 목사가 건축가 노릇도 합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기초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일 뿐, 목사는 기초도 아니고 건축가도 아닙니다. 여러분과 같은 하나의 돌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배운 대로 오늘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교회입니다. 바울이 세우고, 가장 오랜 시간 눈물로 양육한, 그냥 바울의 교회라고 말해도 아무 이상할 게 없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러나 본문 어디에서도 우리는 바울의 이름이나 권위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름은커녕 그의 존재감 자체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오직 주님의 교회이고, 그 설계와 기초와 건축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주님만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목사의 생각대로 교회가 세워져가도록 내버려두시면 안 됩니다. 목사를 통해 주시는 교회의 비전과 방향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여러분은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셔야 합니다. 고백교회가 절대로 목사에 의해 좌우되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며, 그저 돌무더기이고,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돌탑이 되어갈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관계, 우리의 인간적인 친밀함이 교회의 본질을 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그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우리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과의 친밀함 위에, 끈끈한 공동체 의식 위에 교회를 세운 게 아닙니다. 서로 싸우고 다투는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믿음의 반석 위에 함께 세우셨고, 본문 13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가깝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은 인간적인 호감이나 일치되는 기호(嗜好)나 같은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고 삶의 습관이 달라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지만, 그것은 교회를 이루는 데 하등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주로 시인하느냐, 그것이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의지와 믿음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관계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닙니다. 서로 관계가 좋다고 교회가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잘 통하고 대화가 잘 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가 편하다는 이야기는 공동체 안에 진리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관계는 반드시 진리와 충돌하는 위기의 때가 오게 됩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그 관계가 주는 유익과 그리스도 예수가 요구하는 순종의 요구, 자기 부인의 요구가 충돌하는 때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멋지게 신앙고백을 하고, 주님이 칭찬하시며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그 좋은 관계 속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엄청난 책망을 받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된다고, 자신이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겠다고, 베드로가 주님 편에서 강변하지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마16:23)한다고,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한다고 한 말이고, 주님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주님은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의 좋은 관계가 아니라 주님이 감당하셔야 할 자기 부인의 자리를 지키심으로 교회의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서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목사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서로가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돌무덤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유다가 그러다 망한 겁니다. 서로 괜찮다고, 서로 잘 하고 있다고,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만 하다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집단적 평안을 위해서만 모였다가, 결국 교회가 아닌 패거리가 되고 돌무더기가 되어 함께 멸망의 길을 갔습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기초는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가 내 구주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택하여 교회로 부르셨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과 그분이 매순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의 길, 자기 부인의 길을 우리가 함께 뒤따르는 그것이 교회의 기초임을 우리 모두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교회로 부르신 이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21절, 22절 다시 한 번 합독합니다. “21.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가 무엇이 되어 간다고 합니까? 네, 성전입니다. 22절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라 합니다. 같은 말이 계속 반복되어 강조됩니다.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인 분명합니다. 거기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집이 되고, 하나님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런 과정 속에서 저와 여러분 자신이 교회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 각자가 또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갑니다. 이것이 교회의 신비입니다. ‘우리’라는 교회 속에서 ‘나’라는 교회가 빚어져가는,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건축 비법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대로 우리 모두가 고백교회를 이루어 가며 스스로 성전으로 빚어져 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연말 연초가 되면 우리는 뭔가를 결심하고 결단합니다. 금연이나 다이어트, 독서나 운동과 같은 어떤 좋은 하나의 행동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또 그보다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떤 가치를 향하여 사는 사람이 될 것인가, 즉 하나의 인간됨을 결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런 개인적인 행동이나 인격에 대한 결심을 넘어서서, 하나의 연합된 인격으로서, 그 연합된 인간됨에 대해 결심하기를 권면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혼자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나 다르고 쉽지 않은 우리를 하나로 부르셔서 교회를 이루게 하십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자신만의 신앙을 생각하면서, 그렇게는 교회가 될 수 없다 하십니다. 돌들이 따로 떨어져 어찌 건축이 되겠습니까? 힘들지만 어떻게든 우리는 연합해야 하고, 어떻게든 서로를 견뎌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교회가 되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에베소서 2장이 내년 새해 한 해 동안 우리가 붙들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가 다시 새 마음으로 함께 서십시다. 나 홀로 신앙의 거인이 되고, 나 홀로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제자가 되는 그런 소망과 결단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주님의 뜻대로, 함께 거룩한 성전이 되어가는, 함께 그리스도의 몸으로 계속 성장해가는 그 연합된 믿음의 결단이 저와 여러분에게 2018년 한 해 새롭게 이루어지기를, 그래서 주님이 거하시는 우리의 삶, 우리 고백교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