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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에 죄를 정하사' 2017년 12월 10일 주일 설교
2017-12-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1210 대강절 두 번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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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1~11절,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설교 음성파일 : 이번 주는 음성이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로마서 강해 26) 본문 3절의 ‘육신에 죄를 정하사’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로마서 8장 3절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상고해보려고 하는데요, 이 부분은 우리가 지난 3주간 살펴본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의 가장 안쪽에 있는 이야기이자, 그 말씀들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예를 들면, 본문은 자동차의 엔진 같은 그런 부분이라 하겠는데요, 자동차가 움직일 때 사실 진짜 중요한 일들은 겉으로 보이는 데서 일어나지 않지요. 운전석에서 핸들을 붙잡고, 가속페달(accelerator pedal)을 밟는 게 자동차가 움직이는 진짜 이유는 아닙니다. 어떻게 자동차가 앞으로 나가는가를 알려면 사실 보닛을 열고 엔진룸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동차의 원리, 자동차의 비밀, 자동차의 ‘자동차 됨’은 겉으로 보이는 뭔가에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보이지 않는 저 안쪽에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안쪽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것이 바로 오늘 3절 후반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에서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 차가 움직이지 않을 때, 자동차를 좀 아는 사람들은 보닛을 열고 그 안쪽을 살핍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저 안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모두 알기 때문이지요. 운전 중에 차가 멈췄는데 핸들만 자세히 본다든가, 타이어만 교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에 있어서는, 그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일들이 쉽게 일어납니다.
구원과 신앙의 정말 중요한 문제, 복음의 진리는 저 안에 있는데도, 그저 밖으로 나타나는 결과와 현상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의 내용과 결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깊이 묵상하기보다는, 그저 남들이 바라보는 우리 신앙의 겉모양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실제 그 삶은 별 진전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차의 겉모양이 아무리 화려하고, 비싸고 좋은 걸로 아무리 치장해 놓아도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그건 그저 고철에 불과하듯,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과 인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건강하고 온전할 때 비로소 구원이 우리의 삶에 임했다 할 수 있습니다. 부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삶의 엔진을 다시 힘차게 뛰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같이 구원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본문 3절과 4절을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시고 그의 육체 가운데 죄를 정하신 것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하나님의 계명, 율법이 할 수 없던 것, 곧 그 율법대로 순종하는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인데요, 오늘 살펴볼 내용은,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했다.”는 3절 후반부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다.”인데, 본문에서는 조금 다르게 표현이 되어 있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와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자 여러분, 오늘 읽은 본문(1~11절)에 제일 자주 등장하는 명사가 무엇입니까? 네,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그 어감은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네, 매우 부정적입니다. 6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합니다. 또 7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이 ‘육신’이 단순히 우리의 육체, 몸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육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σάρξ]인데요, 원칙적으로 우리 인간의 몸, 육체를 말하지만,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본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육체를 부정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육체란 영혼의 감옥이라 생각했지요. 육체가 없을 때 영혼이 비로소 자유하고, 그런 상태의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닙니다. 육체 없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의 영혼이 가는 곳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가는 곳이며, 영생은 영혼만이 아니라 영과 육이 함께 누리는 복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이 육체를 성경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 말씀합니다. 육체는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의 이 ‘육체’는, 본문이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 ‘육신’이 되기가 너무 쉽다는 겁니다. 아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뭔가를 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육체는 전부 육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지 않고, 육체는 오로지 탐욕과 이기심의 도구로서, 사용됩니다. 이것은, 죄가 자신의 도구로 우리의 육체를 택했기 때문이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육체를 온전하게 다스려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는 능력을 이미 잃어버린 채 태어나, 예정된 노화와 죽음을 향해 두려움 가운데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몸은 참 이상합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몸을 사용하면 몸은 망가집니다. 피곤하고 힘드니까 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그래서 운동도 안 하고 관리도 안 하면, 몸에 유익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이끄는 대로 살면, 육체가 요구하는 대로 먹고, 마시다 보면 어느새 몸이 상해 있습니다.
건강은 그런 몸의 욕구를 다스려서 뭔가에 복종시켜야 시작됩니다. 입에는 쓰고 맛도 별로 없는 그것들이 실은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합니다. 저도 돌이켜보면 제 몸이 제일 건강했을 때는 제가 군에 있을 때였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실은 제가 제일 건강했을 때였습니다. 몸무게는 지금과 비슷한데 그땐 훨씬 건강한 상태였습니다. 소위 관리가 되면 우리의 육체는 적당한 무게와 적당한 크기로 스스로 균형을 맞춥니다. 몸을 지키려면 몸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몸의 욕구를 제어하고 절제하며, 힘껏 거슬러 다스릴 때 비로소 몸은 건강해집니다.
사실 이건 인간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타락의 특징입니다. 일반적인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그들의 몸이 죄와 사망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몸이 이끄는 대로, 본능대로 행동해야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습니다. 동물의 몸은 비록 죄가 다스리고 있는 이 척박한 환경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만 기능할 뿐, 인간의 몸처럼 적극적인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동물의 육체는 죄를 담지 못합니다. 죄를 견디지 못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거라사’라는 요단 동편 지역에 여러 귀신들린 한 사람을 예수님이 고쳐주신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 사람 안에는 놀랍게도 군대 단위의 엄청나게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몸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시자, 그 귀신들은 차라리 (율법이 부정하다 규정하는) 근처의 돼지 떼에게 들어가 있도록 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주님이 받아들여주시자, 그들이 돼지 때에게로 들어갔는데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지요? 네, 돼지 떼가 비탈길로 내달려가더니, 그대로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서 몰사하고 맙니다(마8:32). 짐승의 육체는 귀신이나 사탄과 같은 영적 존재의 그릇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은 본능에 따라 살아가긴 해도 그것이 곧바로 죄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인간처럼 배불러도 남의 것 빼앗지 않습니다. 오직 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마십니다. 몸이 요구하는 이상 먹지 않고, 그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만약 사자 같은 맹수가 인간처럼 탐욕스럽다면, 그래서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아무리 가져도 행복을 모른다면, 아마 이 땅의 모든 동물들의 씨가 마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몸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절제를 모르고, 그 몸을 거룩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아니 모르는 게 아니라 알아도 선택을 못합니다. 성경은 그것이 죄로 인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죄가 다름 아닌 우리의 육체를 통해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가 다스리고 이용하는 육체, 그걸 성경은 육신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몸은 반드시 소멸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새 몸으로 우리를 일으키셔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구원하실 거라고 약속하시지요. 그게 본문 23절 말씀의 표현, ‘몸의 속량’이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바로 그 육신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3절 후반부이지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사망과 소멸이 예정되어 있고, 죄에 의해 다스려질 운명에 놓인 그 육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이 그렇게 오셔야 했을까요? 우리와는 조금 다른 육체로 오시면 안 되시나요? 꼭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어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우리를 온전히 체휼하심을 넘어) 우리와 같은 모습, 같은 육체로 오셔야만, 예수님이 하신 일의 결과가, 예수님의 육체에서 일어난 그 무언가가, 우리에게도, 우리의 몸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기 전이나 후나 우리의 육체는 같지만, 그 목적과 쓰임과 본질이 다르게 되도록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 그대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의 그 육체 가운데 뭔가를 행하신 것입니다.
그 뭔가를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씀인데요, ‘그 육신에 죄를 정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조금 어려운데요, 여러분 우선 거기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옆에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사’라고 따로 적으시기 바랍니다.
여기 ‘정하사’라는 단어는 1절에서 ‘정죄’라고 옮겨진 단어, [κατακριμα]의 동사형, [κατακρίνω]입니다. 그러니까 ‘정하사’라는 말은 뭔가를 결정하고 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죄한다, 저주하고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육신에 죄를 정했다는 것은,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했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우리의 육체를 육신이 되게 하는, 죄의 도구가 되게 하는, 그 죄 자체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He condemned sin in the flesh, NASB).
조금 어렵게 느껴지시지요? 여러분, 예수님의 몸, 그러면 우리는 보통,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신 몸, 이렇게만 생각하는데, 실은 예수님의 몸에서 그 이상의 뭔가가 일어난 겁니다.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그 부분은 사실 3절 중간에 보면, ‘죄로 말미암아’라는 구절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상 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 ‘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 [περὶ ἁμαρτίας](70인 역 참조)가 실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받으셨다’고 하는 뜻이고, 구약성경에서 ‘속죄의 제물’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것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죄로 말미암아’라고 아주 간단하게 옮겼습니다. 여러분은 그 밑에 ‘속죄의 제물로’라고만 적어 두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건 예수님의 몸은 단지 짐승 대신 드려진 제물, 우리 대신 형벌을 당하신 몸, 그 이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은, 죄 자체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한 하나의 법정이자, 형장(刑場)으로 사용된 겁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육체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ὁμοίώμα]이었지만, 죄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죄와 죄인을 분리하는 것, 이게 말은 좋은데 어떻게 가능하지요? 우리의 모든 사법적인 처벌은 죄인을 처벌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를 처벌하는 것입니까? 네,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지 죄를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지은 사람을 감옥에 보내는 건 죄인을 처리한 것이지 실상 죄를 처리한 게 아닌 겁니다. 죄와 죄인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 자체를 정죄하려면 역설적으로 죄인과 죄가 분리될 수 있는 누군가, 곧 죄 없는 ‘의인’이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 일을 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죄를 죄인과 분리하여, 죄인이 아니라 그 죄를 심판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은 처음으로 죄인과 분리된 죄가 드러난 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육체를 사망의 권세 아래로 끌고 들어간 죄가 선명하게 그 육신과 분리되어 드러난 장소가 주님의 몸입니다. 절대로 죽음에 넘겨질 수 없는 예수님이 죄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저주 속에 죄와 함께 심판을 받습니다.
인간의 육체를 육신이 되게 만드는, 그 죄의 권세와 힘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사망에 넘겨졌습니다. 인간 안에 거하고, 인간을 기만하며, 그렇게 해서 인간에게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세력, 권세로서의 죄 자체가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선한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육체 안에서 은밀하게 숨어, 마치 그것이 자신의 세상인 듯, 자신의 것인 듯, 활개치고 다니는 죄의 권세가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비로소 드러나고 정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그 정체가 드러나 정죄를 받은 죄의 권세는 더 이상 우리의 육체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 죄가 정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 있는 육신은 십자가에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미 죽었고, 그 예수를 부활의 몸으로 일으키신 그 성령 하나님이 지금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더는 죄의 몸이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고, 버리셨고, 살리셨습니다. 할렐루야!
내용은 조금 어렵지만, 이것이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라는 자동차의 엔진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저와 여러분 안에 성령이 머무시고 내주하시며, 우리의 몸이 육신이 아닌 성전이 되게 하는 일을 계획하고 행하십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육신이라는 말의 정반대편에 어떤 말이 있습니까? 네, ‘영’(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의 핵심은 사실 육신과 영입니다. 이 둘의 강한 대조가 본문 전체의 구조이고, 핵심입니다.
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다름 아니라, 그 현실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사람, 그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사실 1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구절에는, 이 부분을 수식하는 어떤 어구가 생략이 된 채 우리말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저도 본문을 여러 영어 번역본으로 보다가 발견한 건데요, 어떤 성경에는 뭔가가 추가되어 있고, 또 어떤 성경은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과 똑같이 그것이 빠진 채 번역이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가장 권위가 있다는 KJV 같은 경우에 우리 성경에는 없는 구절이 포함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성경의 여러 사본들을 비교해보니까 이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본의 문제였어요. 헬라어 사본들 중에 이 부분이 남아 있는 사본도 있고, 빠진 사본도 있었던 겁니다. 그 생략된 부분이 뭐냐면, 바로 4절 맨 처음에 나오는 구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1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 말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작은 차이이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정죄함이 없다, 이게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육신이 아닌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고, 바로 그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의 현재적 의미는, 육신이 아닌 영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8장 처음부터 강조되고 있고, 8장 전체의 내용을 이끌어갑니다. 육신을 따르는 것과 영을 따르는 것, 이 둘을 대조하여 성도의 현실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삶은 무엇을 따라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엔진 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성령의 욕구가 분출하며 그 힘으로 전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버린 육신의 욕구, 탐욕과 이기심의 힘으로 우리의 삶이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여전히 육신의 욕구가 성령의 욕구를 대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기 직전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시고, 기도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때 제자들도 함께 갔는데요, 주님은 그 중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만을 데리고 따로 올라가셔서, 그 세 사람에게만 조용히 기도를 부탁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마26:38, 새번역) 그리고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주님은 얼굴을 땅에 대신 채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하셨지요. 한 시간 쯤 지나 주님이 세 제자들에게 가셨는데, 그때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지요. “40.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의 연약한 육신의 모습을 탄식하시는 주님의 말씀인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말씀은 참 이해가 잘 안 가는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육신이 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든 것인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명령하십니다. 육신이 약하다고 하셨으면, 먼저 자고 기운을 차려 기도해라, 이렇게 하시던가, 아니면 내가 육신에 힘을 줄 테니 일어나 기도해라,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싶지만 몸이 약해서 기도를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그러니까 깨어 기도해야 된다고, 육신이 약해서 시험에 빠지니, 그래서 더 기도해야 한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마음이 헤아려지시는지요?
우리는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한다고, 육신이 약하기에 더욱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 차이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로마서 8장이 하려고 하는 진짜 속 이야기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약해서 주님이 우리의 육신의 욕구를 채워주셔야 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주님은 육신의 욕구가 채워져도 여전히 그 육신의 힘으로 순종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육신이 조금 나아지면, 좀 더 건강해지고, 좀 더 형편이 나아지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더 잘 믿고 더 잘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건 육체나 우리의 형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따라 행하고 있느냐, 우리가 어떤 욕구에 순종하느냐, 거기에 달린 문제라고 하십니다.
육신을 따라서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고 주님의 십자가가 선언하셨습니다. 육신을 이롭게 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을 이길 수 있는, 그 육신만큼 강하고 분명한 욕구를 우리로 가지게 하시고, 따르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욕구,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피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여전히 육신에 머물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성령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앙이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고 있기 때문에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13절에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제가 이번주간에 기도원에 다녀왔는데요, 사실 제 육체는 큰 호강을 누렸습니다. 일상으로부터 떨어져서, 좋은 공기 마시며, 누군가가 차려주시는 밥 먹고, 많은 집안일로부터 자유를 얻어, 정말 제 몸이 큰 쉼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이전보다 제가 더 기도하기가 쉬웠을까요? 교회와 집에서보다 더 기도가 잘 됐을까요? 아닙니다. 몸이 편하다고, 그리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성령을 쫓아 사느냐’이지, 상황과 건강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의 거룩함은 절대로 상황이 좋아서 생기는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따라 순종하며 사느냐, 내가 무엇을 의식하고자 하느냐, 거기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본문은 육신과 성령을 아주 치열하게 대립합니다. 둘 사이에는 마치 중간지대가 없는 것 같이 이야기합니다. 육신을 따르면 오직 육신의 일만을, 영을 따르면 오직 영의 일만을 하게 된다고(5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6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게 된다고(7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8절),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단언하여 말합니다(13절). 여기에 중간은 없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강한 의지와 욕구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육체의 본능만큼 강하고 질긴 거룩한 본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할 때 욕구불만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도 강력한 욕구의 불만을 경험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무엇의 요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신앙마저도 그 육신의 필요를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가, 육신의 연약함을 핑계 삼아, 거룩한 본능에 무감각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 삶을 움직이는 힘이 내 육체인가, 성령인가, 여러분 스스로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본문 13절과 14절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