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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법' 2017년 9월 3일 주일 설교

2017-09-03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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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3 오순절 후 열세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3장 19~28절, 믿음의 법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903.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된 파일을 내려 받으시면 좀 더 분명하게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13) 본문 27절의 ‘믿음의 법’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봤습니다. 단지 죄가 되는 행동을 우리가 선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권세와 능력 아래, 인간이 선택을 당하여 살고 있다고 했고, 성도는 그러한 죄의 권세에 맞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권세로, 싸우는 운명을 가진 존재임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질문 하나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죄’의 반대가 뭘까요? 무죄도 가능한 답이겠고, 또 선행 이런 것도 가능할 텐데요, 로마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답은, 바로 ‘의’입니다. 본문 9절의 ‘다 죄 아래 있다’에서 ‘죄’라는 단어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인데요(*),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화살이 표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에서 왔습니다. 가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고, 벗어나버린 그런 행위나 상태를 의미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거룩하고 아름답게 창조되었는데, 그러한 표적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행동이나 결과, 그렇게 된 상태, 이런 것이 바로 죄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의미가 넓지요? 그런데 ‘의’라는 단어, ‘짜(싸)디크’ 혹은 ‘디카이오수네’가 이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있어야 바른 곳에 정확히 있다는 뜻이고, 다른 존재에 대하여 바른 관계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 또 그 관계 안에서 적합한 행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직 유치원도 다니지 않는 어린아이라면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열심히 놀고 쉬면 그게 ‘의’로운 겁니다. 아이에게 설거지 하고 집안 청소하고, 막 어려운 공부하고 이런 것은, 물론 하면 기특하겠지만, ‘의’의 상태인 건 아닙니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 의로운 것이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고 돌봐야 의롭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지요? 그러니까 지금 본문에 계속 등장하고 있는 ‘의’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죄를 안 짓는 것이나 그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풍성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희생을 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었고, 그 관계 안에서 더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과 함께 그 회복된 관계에 합당한 우리의 역할을 이제부터 하나님을 향해 감당해야 한다는 것까지 모두 다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가기 위한 조건이 하나 있다고 하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네, 맞습니다, 믿음입니다. 22절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수네)가 미쳐서, 다름 아닌 그 하나님의 의로 의로워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설명이 좀 더 필요하지만 그건 다른 시간에 더 하기로 하고…)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믿음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믿음’이라는 단어가 정말 여러 번(22절부터 25절, 26절, 28절, 30절, 31절 등) 반복되고 있는데요, 이 말의 의미가 정확히 뭔가요? 만약 이 믿음이라는 말을 어려워하는 어떤 아이에게 이걸 조금 쉽게 설명하려면 어떤 단어로 바꿔서 설명하면 될까요? (그냥 무작정 덮어놓고 믿어라, 이건 어른의 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분명히 믿기는 믿는데 설명하기는 조금 어렵지요?(*) (국립 국어원에서 제공한) 국어사전에서 ‘믿다’라는 동사를 찾아보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이나 말을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다고 여기다.’ 이해는 가는데, 지금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믿는 믿음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지요? 또 이런 설명도 있습니다. ‘절대자나 종교적 이념 따위를 받들고 따르다.’ ‘절대자’ 대신 ‘예수님’을 넣어보면, ‘예수님을 받들고 따르다’인데, 이것은 믿음보다는 그 이후 ‘제자’의 의미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역시 지금 본문이 말하는 믿음에서는 조금 벗어난 그런 설명입니다. 사전 아래쪽을 좀 더 찾아보면서 이런 설명을 보게 됐습니다. ‘어떤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이걸 보고 제가 무릎을 딱! 쳤습니다. 소름도 돋았습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설마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 해당하는 정확한 설명이 있을까, 생각을 하고 혹시나 하고 찾아본 건데 이게 딱 있는 겁니다. 사전을 예수 믿는 분이 만들었나, 싶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핵심이 이겁니다. 예수를 의지하는 것, 그리고 그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건 내가 점점 독립적이 되는 게 아닙니다. 점점 더 의존적이 되고 더욱 주를 기대하는 걸 의미합니다. 믿음의 역설입니다. 나의 인격이나 거룩, 심지어 내가 믿는 그 믿음이라는 것 자체도 점점 의지하지 않고, 오직 나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지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완전한 화목제물이심을 받아들이고, 최종적인 의의 판결을 소망 가운데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말은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의지하십니까? 예수님에게 뭔가를 기대하십니까? 비단 천국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여러분은 예수님을 의지하십니까?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신실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을 기대하십니까? 우리의 모습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때론 많이 부족하여 삶이 좀 X판이어도) 여러분은 그런 여러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기대하며 그 이름을 부르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믿음의 법’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 믿음이 바로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한 마디로 의로운 상태인 것이지요. 혹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그런 삶은 아닙니까? 단지 열심히 살고 있을 뿐, 그 ‘열심’이 하나님을 무관하고, 또 더 무관해져 가는 그런 ‘열심’은 아닙니까? 내 인생은 단지 나의 노력과 의지와 재능으로 결정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또 뭐라고 축복하여 말씀하셨든 간에,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또 기대하지도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뭔가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겁니다. 그건 엄밀히 말해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구원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믿음의 법,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누군가는 믿음을 참으로 쉬운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예수를 믿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의 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다른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예수를 의지하고 기대하는 게 어렵습니다. 내 힘을 빼고 그러면서도, 절망을 이기고, 예수를 의지하고 기대하는 게 너무나 어렵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방식에 익숙하지를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선택하고 개척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3)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예수를 믿고 나면 알게 됩니다. 아니, 이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대하는 건 지금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행하시는 많은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대하고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성도의 삶에 고난이 빠지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가 그래서입니다. 우리가 보통은 자의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워 가시는 걸 보십시오. 그 시작이, 좋은 곳에 정착해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나그네로 불러 광야로 내보내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로 부르시는 것, 그것이 믿음의 출발이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아브라함은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이 있기 훨씬 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는 죄나 속죄의 문제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죄가 뭔지, 용서가 뭔지 알기 전에 ‘의’를 알고, 깨닫고, 살아낸 사람입니다. 로마서 4장에 곧바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을 아예 몰랐으니, 아브라함에게 의로움이란 본질적으로 죄를 사함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그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배웠고, 또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이든 아니든, 믿음은 일단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가 주시는 은혜와 소망을 기대하는 것임을, 우리 믿음의 조상의 삶이 증언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런 자리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연약해지는 자리, 무능해지는 자리, 실패하는 자리로, 계속 인도하시며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나그네였고,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유약했고, 또 비겁했습니다. 그런 성품과 환경과 삶 속에 내던져졌기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형편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의지하기는 일도 많았지만 말입니다. 요즘 창세기 강해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저는 제가 계속 믿음의 시험을 당하는 느낌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해 시작하신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일들이 지금 저에게도 계획되어 있고, 진행되고 있음을 제가 믿고 있는지, 하나님이 매번 도전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복이 되게 하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삶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게 하셨던 그 일이 지금 제 삶에서도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 일을 위해 낙심하지 않고 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하나님은 계속 제게 묻으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는 그 일이 아주 곤고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때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믿기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인식하지 못했던 죄라는 중요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믿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나그네를 꿈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게 별로 없는 시대, 하나님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환경과 조건으로만 보면, 오늘의 현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여러 성들, 예컨대 소돔과 고모라 성 같습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의지하지는 않습니다. 힘들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풍요롭고,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에게 있다고, 네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만드는 것, 그게 믿음의 법이 아닌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그네를 애써 정착시키고, 그의 삶에서 광야를 몰아냅니다. 믿음이라는 게 필요하지도 않고, 있을 자리도 없습니다. 삶이 힘들어도, 돈을 좀 더 벌어 그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대하지 않는 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믿음,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순종인데요, 이처럼 믿음과 동전의 양면 관계에 있는 순종은, 그래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또 다른 믿음의 통로입니다. 순종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내 빈약한 믿음을 그제야 발견하게 되지요. 이것 역시 역설적입니다. 순종이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그래서 우리로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난주 말씀처럼, 우리가 죄의 권세를 인식하고 그것과 싸우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절감하게 되는 때가 바로 죄의 권세 앞에 서서 싸우려고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식의 믿음의 삶을 살아낸 사람의 표상 같은 존재가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죄의 문제와 정면으로 싸우다가 믿음의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게 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믿음을 발견했지요. 죄를 의식하고, 죄를 이기려고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결국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가 자꾸만 자신을 죄의 법 아래로 끌고 간다고 탄식했지만, 사실은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그 사람의 몸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의 몸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계속 그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내가 구원 얻은 것이 내 실력이 아니구나,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죄를 이길 수 없구나!’ 매번 새롭게 깨닫게 되지요. 본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없이는 죄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아무리 눈에 보이는 율법이 있어도, 그걸 줄줄 암송하고 있어도,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남을 정죄하는 데만 잘 보이지, 나의 죄를 깨닫는 데는 잘 안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가 있다는 것을,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인 것이 죄라는 것을, 몇 년이 지날 때까지 모르다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를 통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 거지요.  요즘 교계에서는 유명한 청소년 사역자 한 분의 오랜 성적 일탈 문제가 계속 회자되고 있습니다. 해마다 엄청난 규모의 집회를 열고, 주강사로서 수많은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쳐 온 탁월한 사역자인데, 알고 보니 4년 동안 여학생을 성적으로 유린해 온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죄의 노예임을 그 긴 시간 동안 아예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가 죄를 드러낸 게 아니라 죄가 그를 드러낸 겁니다. 비단 다윗이나 그 사역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분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성적인 문제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게 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야에 완전히 가려진 부분들이,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분별하지 못하는 죄들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함으로써 깨닫게 될 그런 모습이 우리 안에 지금도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아실 겁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라는 교회를 향해 시력을 회복하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좀 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자신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의 미지근함을 통탄하시며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그런 지경인데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이 부자라, 부요하다,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스스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겁니다. 의지하지 않는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모습인 건 아닙니까? 혹시 우리 교회가 그 모습이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우리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죄를 이깁니다. 죄의 법에서 벗어나려면 참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를 의지해야 하고, 그를 구해야 합니다. 부디 주님이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보게 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여, 우리의 일상이 바쁜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진정한 쉼이 없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쉬지 못하게 만드는 세상 탓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달 QT 본문 출애굽기 말씀 중에 있었던 말씀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최소한 세 번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1년에 세 번이니까 정말 편하고 좋았겠다 싶지만, 중요한 건 가까운 데 교회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시다시피 예전에는 예배를 예루살렘에 가서 드렸습니다. 그러니 저 북쪽 갈릴리 지역에 사는 사람이나, 저 남쪽 브엘세바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땅을 상당 시간 비워두고 긴 시간 걸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가축을 돌볼 수도 없고, 정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더구나 국경 지역에 사는 백성들은 주변의 적들이 쳐들어올까 무서워서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거 내가 책임질 테니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겁니다. 너희가 쉬는 그날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날이고, 너희가 예배하는 그 날이, 하나님이 싸우시는 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쉴 동안 적들이 공격하지 못하게 하나님이 막아주시기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뭇 민족을 쫓아내주시고, 오히려 그 기회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혀주실 거라고 약속하셨습니다(출34:23~24).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너무 믿기 어려운 말씀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께서 싸우신다’, ‘하나님께서 이기신다’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이기시려면 우리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쉼이란 아무 일도 안 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예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쉬며,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여러분, 바쁜 일상 속에서 말씀 앞에 멈춰 서고, 그 말씀 안에서 기도하는 일을 우리가 왜 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에 정말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 아닙니까? 주님이 싸워주셔야만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 지 여러분 너무나 어렵지 않습니까? 재작년에 영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중에 ‘Humans’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혹시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요, 인공지능 로봇이 점점 발달해서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다 그들이 맡아서 하게 되는 세상, 그리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과 존재감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려낸 드라마입니다. 아이가 아빠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동화책을 읽어줘야 하는데, 아빠보다 로봇을 원합니다. 엄마가 정성스레 차려준 아침보다 로봇이 준비해준 아침을 더 좋아합니다. 점점 사람의 손이 필요 없어집니다. 지금 있는 거의 대부분의 직업이 로봇으로 대체될 거라고 하지요? 사람의 일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세상, 직업이 다 사라지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자신의 일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 여러분 얼마나 남은 것 같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앞으로 20년이면 그런 세상이 온다고 합니다. 20년 후면 저는 은퇴할 나이인데, 아마 청년 여러분은 아닐 겁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시기이지요. 여러분 그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고, 세상의 복이 되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을 의지하는 게, 그러면서 기대하는 그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나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고, 자랑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연약한 자,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가장 능력 있는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쓴 시편 37편 5절과 6절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며 설교를 마칩니다. 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그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께서 행해 주시리라. 햇빛처럼 너의 옳음을 빛나게 하시고 대낮처럼 네 권리를 당당하게 해주시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내십시다.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며, 주님을 기대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그런 믿음의 법 아래에서, 세상의 복이 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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