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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은혜" 2014년 3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2014-03-16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9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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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316 사순절 두 번째 주 ----------------------------------------------------- 요한복음 2장 23절 ~ 3장 15절,  거듭남의 은혜  * 설교 음성파일 : http://www.4shared.com/mp3/fGPXWtp3ba/20140316__2___.html (클릭) 사순절 두 번째 주 말씀으로 ‘거듭남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이제 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으면서 정치권이 매우 소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당선이 유력하고 인지도가 높은 사람을 어떻게든 자신들이 속한 당으로, 이른바 ‘모셔오기’ 위해서 각 당마다 부산합니다. 주님이 처음 이 땅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그와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당과 조직이 결성되고 또 그 세를 불려가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젊은 예수님의 등장은 말 그대로 센세이션 그 자체였고, 각 당은 과연 예수를 영입할 것이냐, 아니면 흠을 잡아 끌어내릴 것이냐, 셈을 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에피소드입니다. 본문 2장 23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고 믿었습니다. 여기 ‘믿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 표적에 열광하는 군중의 환호였고, 더 나아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공동체적 힘을 모으려는 일종의 ‘모셔가기’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24절, 25절 말씀과 같이 당신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주님께 열광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고, 또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주님을 모셔가려는지 훤히 꿰뚫어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풀고 넘어가야 함을 알게 됩니다. 23절에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표적을 보고 주님을 믿었다고 기록하는데, 그렇다면 이 믿음은 과연 무슨 믿음인가, 하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본문의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듭남의 믿음, 즉 구원을 위해 필요한 중생의 믿음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의탁하다’는 단어 ‘에피스튀엔’은 ‘믿다’라는 헬라어 ‘피스튜오’의 미완료능동태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절 ‘믿음’에 해당하는 ‘피스튜오’의 시제는 미완료가 아니라 부정 과거 시제 ‘에피스튜산’입니다. 잠시, 일시적으로 ‘믿었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진정성 있는 믿음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아울러 그러한 사람들과 그들이 가진 믿음을 주님은 결코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요한 사도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이라 부르는 그것을 주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이처럼 시제의 구별을 통해 표현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단지 우리의 ‘믿는다’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으십니다. 참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친히 모든 사람의 속을 다 아십니다. 왜 믿는다고 말하는지, 왜 주님을 따라다니는지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믿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주님을 따르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이 있고난 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더 열광하며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은 더 충격적이지요. 오늘 본문의 사람들과 같이 표적을 보아서도 아니라 그저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표적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놀라운 능력의 결과인 초자연적인 현상을 봐서가 아니라, 그저 그것의 부산물에 불과한 떡과 고기에 배가 불러서 주님을 따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고, 따르며, 오늘 또 예배를 드리지만, 그 가운데 정말 많은 사람들은 그저 주님이 주신 떡에 배불러 주님을 따라다닐 뿐입니다. 주님을 믿으면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더 잘 먹을 수 있겠구나, 그저 그 한 생각으로 주님을 믿고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속을 다 아시고 그들을 ale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는 표적의 부산물에 불과한 떡보다는 표적 그 자체에 마음을 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 때문에 주님을 따라다닌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조금 나은 종류의 신자(信者)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그러할 뿐, 주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여전히 거듭남과는 상관없는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바로 3장에 등장하는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그와 같은 사람들이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배가 이미 불렀습니다. 잠시 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만, 니고데모는 이미 표적의 부산물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충분히 먹고 살만 했고, 부족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표적 자체에 관심이 있었고, 표적이 주는 놀라움에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또 기적을 보기 위해 주님께로 옵니다. 그리고 니고데모가 본문 2절에서 말하듯,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얼핏 대단한 신앙의 고백 같으나 주님은 이처럼 표적에 마음을 두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역시 믿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그들을 단번에 폄하해 버리시고, 앞서 배부른 까닭으로 주님을 쫓은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떠나가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3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는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내용입니다. 표적에 놀라고 당황한 니고데모, 그런데 니고데모는 단순히 표적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이들과는 또 다른 모습인 것처럼 본문은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3의 그룹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니고데모에 관한 설명이 잠깐 필요해 보입니다. 3장 1절이 전하는 대로,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당장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 바리새인들은 전혀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분리’라는 어원을 가진 이 ‘바리새인’은 정말 철저하게 세상과 ‘구별되어’ 율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바리새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아, 이 사람은 종교적 완벽주의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만큼 신앙적 완전을 추구하는 이들입니다. 경건한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심지어 전쟁터에서 적이 칼을 들고 공격해 오는 순간에도 무기를 들고 뛰지 않을 정도입니다. 율법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는, 그만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이들입니다. 또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각주에 보면 이 ‘지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데요, 바로 산헤드린 공회원을 가리킵니다. 산헤드린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던 당시 최고의 정치 기관입니다. 오늘날 국회의원보다도 훨씬 더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는 물질적으로도 매우 부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서에는 니고데모의 가문이 가진 재산이 자세히 기록될 정도였으니까요.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의 장례에 필요한 고가의 향품을 모두 이 니고데모가 구입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 역시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이름이 아니라 헬라어 이름입니다. 당시 일반 평민들은 오직 히브리어나 아람어 이름만을 가지고 있고, 오직 지식인이나 부유한 사람들만이 헬라어이름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니고데모의 사회적 지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주님이 감람산 어디에서 쉬고 머무시는지는 어찌 알았는지, 그는 주님을 만나기 위해 홀로 밤을 밝힙니다. 상징과 비유를 유난히 좋아하는 요한 사도가 굳이 ‘밤’이라는 시간적 특징을 말한 것에 주목해 주십시오. 단순히 시간적인 배경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처럼, 예수님을 빛으로 비유하는 요한에게 밤은 정반대의 어둠과 무지, 그리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주님이 주시는 떡 조각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하기 위해 나가는 장면을 요한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빛이신 예수 안에 있던 유다가 이제 예수를 배반하기 위해 어둠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후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가지고 오는 장면에서 그를 소개하면서 굳이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요19:39)이라고 언급하는 것 역시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의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설명입니다. 이 외에도 그가 굳이 밤에 찾아온 것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아직은 동료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의 눈치가 보였겠지요. 1세기 당시 산헤드린공의회와 예수 그리스도는 상호 대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예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공의회원 직위해제가 가능할 큰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용기 없는 행동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밤이라는 시간은 사람들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운,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어둠과 두려움, 그리고 진정성 모두가 내포된 시간이 바로 밤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일어나는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군중 밖에서,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사람들 안에 있으면 우리는 늘 평안과 안정감 느끼게 되지만, 정작 내게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의 고독한 자리에서 이뤄집니다. 수많은 바리새인들 가운데 이처럼 예수님을 은밀히 찾아왔던 사람의 기록이 성경에는 니고데모가 유일하다는 점은 홀로 주님을 만나기 어려워하고 낯설어 하는 오늘의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예수님을 찾아와 니고데모가 첫 마디를 꺼냅니다. 본문 2절인데요, ‘랍비여’라고 주님을 부릅니다. ‘선생님’이라고 번역될 이 랍비라는 호칭은 사실 그리 간단히 넘어갈 부분은 아닙니다. 당시 랍비는 아무나 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랍비가 되기 위한 정규 교육 과정이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수련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니고데모는 나이도 자기보다 훨씬 적고 율법을 체계적으로 공부도 하지 않은 시골 청년 예수를 처음 만나자마자 '랍비'(선생님)라고 불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그의 마음에 어떤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행하신 표적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무언가 주님의 칭찬이 나올 법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이 주님의 입에서 나옵니다. 본문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얼핏 봐도 동문서답이지요. 니고데모의 말 속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니고데모가 하고자 하는 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은 채 다만 인사만 나눈 셈이니까요. 아마 이 대답은 조금 더 대화가 무르익고 나면 니고데모가 했을 질문의 대답이었을 것입니다. “랍비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했을 때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 질문이 던져지기 전부터 먼저 답을 주십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문제의 핵심을 정면으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가 비록 어둔 밤에 산길을 걸어와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왔지만, 그리고 주님이 누구신지 흐릿하게나마 이해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여러 무리들, 먹을 것 때문에 주님을 찾는 이들이나 표적을 구하는 이들과 하등 다를 바 없이, 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비록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듯(바리새인), 이렇게 나를 찾아 왔지만, 그래서 너 나름대로 그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거듭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실체인 나 예수를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너는 나를 보고 믿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거듭나지 않는 이상, 너는 결코 나를 온전히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줘도 소용이 없다.” 아울러 주님은 이 이야기가 비단 니고데모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본문에 사용된 동사의 수(數)를 통해 분명히 하십니다. 본문 7절에 보면,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에서 ‘네게’라는 단어는 단수이지만, 놀랍게 여기지 말라에 사용된 명령형 동사는 복수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너희는’ 놀라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11절, 12절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너희’라고 하는 복수형 대명사 역시 그러한 사실을 강조합니다. 니고데모뿐만이 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모든 이들을 향해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고 인정하고 칭송했지만, 그것은 거듭난 믿음이 아니다. 예수가 이러저러하다고 말하고, 그분을 찾아 경배하고 존경을 표하는 것 역시 구원이 아니다. 설사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는 아니다. 너희는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 거듭나지 않았으니, 못 알아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나를 믿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와 거듭나지 못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진단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 니고데모와 같이 이 표적을 보고 주님을 찾아 주님을 만난 것으로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삽니다. 가장 중요한 표적은 물론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말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니고데모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같은 진단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 그 표적을 믿는 것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믿느냐,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믿고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거듭남이 우리의 더 깊은 내면의 문제로 들어가게 됩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진정 거듭나셨습니까? 또 거듭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 ‘거듭나다’라는 표현은 ‘게네텐 아노텐’인데, ‘거듭’이라고 번역된 ‘아노텐’은 일차적으로는 ‘위로부터’입니다. 본문의 번역과 같이 ‘다시’라는 말은 이차적인 뜻입니다. ‘위’는 곧 성령을 뜻합니다. 누가복음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5절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의 물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물과 성령이 등위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반복적 설명입니다. 물, 곧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구약 에스겔 말씀에도 맑은 물을 오실 성령으로 묘사하는 구절이 있습니다(겔36:25~28). 다시 말해 거듭남의 핵심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다시 질문 한 가지를 드려봅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영혼은 죽어 있습니까, 아니면 살아 있습니까? 영혼이 죽은 채로 태어납니까? 산 채로 태어납니까? 그렇습니다. 비록 영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영혼은 이미 죽은 영혼입니다. 순결하고 너무나 아름답지만, 아이는 이미 죽은 영혼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네가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때부터 이미 온 인류의 영혼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져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나라를 보려면, 예수를 시인하려면, 먼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말씀드린 대로 위로부터, 성령으로부터여야 합니다. 아울러 ‘아노텐’의 다른 의미 곧 ‘다시’라는 말도 여기 적용됩니다. 그런데 헬라어에서 ‘다시’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파린’과 ‘아노텐’인데요, 의미가 다릅니다. ‘파린’은 반복이지만 달라도 되는 반복이고, ‘아노텐’은 동일한 방식, 같은 유형의 반복이어야 합니다. 예컨대 한 오케스트라가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다 끝내고 청중들로부터 앙코르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아노텐’이라면 반드시 ‘피아노 협주곡’을 다시 연주해야 합니다. ‘파린’이면 어떤 장르이던 상관이 없지요. 그런데 ‘거듭 난다’고 할 때 사용된 것은 ‘아노텐’입니다. 처음 인간이 태어날 때와 같은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거기 성령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난 인간, 그에게 성령이 부어져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오직 성령이 부어져야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도 자기 원대로 창조되고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거듭나는 것 또한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창조하듯, 하나님이 택하여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말은 언제나 수동태입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체로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8절에서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한 것이 그래서입니다. 사실 바람과 성령은, 히브리어에서도 헬라어에서도 모두 둘은 같은 단어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 헬라어 ‘프뉴마’ 다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 바람은 가장 신비한 자연현상으로 이해되어 인간이 결코 그 근원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겼습니다. 마치 바람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근원을 가진다고 주님은 언어의 유희를 통해 말씀하는 것이지요. 이렇기 때문에 거듭남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어떤 값을 주고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은혜로 거듭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하나님나라의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부터 우리의 선택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언컨대,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이 나를 믿도록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거듭났는지를 알 수 있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먹을 것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도, 표적 보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도, 니고데모처럼 주님을 인정하는 것도 거듭남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저는 좋은 신앙과 나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서 구원받았느냐, 아니면 거듭나지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했느냐, 이것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목하십시오. 교회를 다니는 것과 거듭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영향은 받을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출석하고 직분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세상의 행복을 위해, 세상적인 욕심을 위해 살고 있다면, 그는 거듭나지 않은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하며 하루하루 충실히 사는 것 또한 거듭남과는 무관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분명한 방향, 곧 성령이 원하는 일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성령이 바라는 일, 거기에 내 삶의 목적을 둡니다. 성령이 바라는 첫째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요한 사도가 전하는 다른 성경, 요한일서에서 그는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합니다(요일3:3).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자는 끊임없이 거룩함을 향한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과 같이 깨끗해지기 위해 힘써 싸우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그런 기억이 없다면,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은 거룩함뿐만 아니라 성령이 원하는 일들을 기뻐하며 함께 그 일을 위하여 삶을 헌신합니다.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향한 전인격적 노력이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결코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이가 성령이기에, 그가 주인이기에, 거듭난 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나라를 사모합니다. 자신이 하나님나라가 되기를 소원하고, 또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뻐합니다.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기를 즐겨하며, 핍박과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그 나라를 선포하며 세상의 나라와 대적합니다. 그와 같은 열망과 거룩한 근심이 없다면 여러분은 분명 거듭나지 않은 믿음으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그리고 주님이 결코 신뢰하지 않고, 주님이 함께 거하신 적도 없는 그와 같은 군중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주님을 저주하던 그 사람들, 그들이 바로 거듭나지 않은 여러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혹 오늘 말씀으로 거듭남에 대한 의심이 드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분들에게 이 니고데모의 이야기가 하나의 작은 소망이 될 수는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니고데모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진정 거듭났을까요? 아마 그러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의 이후 행적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요한복음 7장 50절 이하에서 바리새인들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할 때,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요한복음 7:51)면서 바리새인들에게 반박한 사람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주님을 찾아왔던 그가 이제 밝은 곳,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모든 기득권의 상실과 심할 경우 죽음까지도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는 주님의 편에 섭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드린 대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낸 사람입니다. 몰약과 침향 백 근을 가지고 와서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새 무덤에 안치하였습니다. 이 또한 그에게는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손수 매장했다는 사실이 산헤드린에 알려진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모든 제자들도 다 포기했던 그 주님의 마지막을 그렇게 지켰습니다. 어떻습니까? 니고데모가 결국 거듭났겠지요? (가톨릭의 전승에 따르면, 니고데모는 순교자로서 성자의 반열로 공경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주님이 오늘 니고데모를 단지 질책하고 훈계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그를 붙드시고, 말씀의 빛을 비추어 그를 새롭게 하려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니고데모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는 대로 성령은 말씀의 영이십니다. 혹 여러분이 거듭남의 확신이 부족하다면, 또 우리가 거듭난 자의 모습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말씀 앞에 나아가 오늘 니고데모와 같이 겸손히 주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아울러 정말 우리가 거듭난 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말씀에 비추어 경계해야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아닌가? 무슨 표적이나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자 교회 오는 것은 아닌가? 진지하게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거듭났지만, 오늘 니고데모보다 못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그래도 할 말이라도 있습니다. 거듭났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거듭난 삶이 아닌 우리의 죽은 삶, 마땅히 수치감과 두려움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거듭남의 은혜를 누리면서도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때문에 염려하며 주님 앞에 칭얼대는 모습, 정말 주님이 어떤 마음이실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말을 이어가실 때마다 수시로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멘, 아멘’이라는 아람어인데 3절, 5절, 11절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얼마나 중요하면 주님이 그렇게 강조하시겠습니까? 참으로 중요한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강조의 말씀으로 오늘 주님이 다시 우리에게 물어 오십니다. “아무개야, 너 거듭났느냐? 내가 네게 하는 말이 이해가 되느냐? 정말 거듭난 자답게 살아가고 있느냐, 그런 것이냐?”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고백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 이보다 더 무거운 질문은 없습니다. 부디 이 질문 앞에 여러분 모두가 “아멘, 아멘!”이라고 화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혹 아직 거듭나지 못한 채 이 말씀 앞에 있다면, 니고데모와 같이 비록 주님의 책망과 훈계가 있다 하더라도 주님 곁에 머물며 그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간절히 바라건대, 거듭났다고 스스로 말하는 여러분, 부디 그 대답에 어울리는 거듭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사람답게 참으로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영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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