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죄를 깨달음이니라' 2017년 8월 20일 주일 설교

2017-08-2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게시된 설교 원문

20170820 오순절 후 열한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3장 1~24절, 죄를 깨달음이니라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820.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11) 본문 20절의 ‘죄를 깨달음이니라’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사실 이 읽은 내용이 조금 어려우시지요? 그래도 너무 이상하게 여기실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성경들에 비해서 로마서는 참 읽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친절한 설명이나 비유도 없고, 뭔가 감동적인 스토리도 없이, 마치 논문처럼 건조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읽은 3장 전반부는 더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ex. 고데트) 이 부분이 로마서에서 가장 어려운 문단이라고도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소위 ‘디아트리베’라 불리는 대화체로 된 질문들(장광설)이 계속 쏟아져 나오기 때문인데요, 이 디아트리베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의 철학자들과 소피스트들이 토론하며 사용했던 수사학의 일종입니다. 이러한 설명도 어렵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많은 이단들조차 잘 읽어내지 못하는 본문 역시 로마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만이 그 진리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책이 로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귀합니다. 저도 묵상을 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 너무 어렵고 힘들다, 너무 딱딱하다’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귀하고 중요하다 여기게 됩니다. 여러분, 조금 어려우시더라도 힘을 내서 열심히 말씀을 씹어 드시고 잘 소화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열심히 여러분의 소화제 노릇을 하겠습니다. 지금 3장으로 넘어온 이 상황에서 로마서를 통해 바울이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본문 20절부터 24절입니다. 이 부분이 로마서 전체의 실질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선 이 부분을 다시 함께 읽겠습니다.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멘. 여러분 많이 들어보신 그런 익숙한 말씀들이지요? 특히 23절과 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것이 바로 복음이지요. 그런데 이 복음의 전제가 뭐냐면,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까지 해 온 이야기, 로마서 1, 2장, 또 3장 전반부에서 말한 내용은, 바로 이 복음의 전제에 해당하는 부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 ‘모든’ 사람을 둘로 나눠서 생각했는데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죄를 범했고,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이방인도 유대인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겠지요. “내가 죄인이라고? 내가 무슨 큰 죄를 그리 지어서 나더러 죄인이라고 하는 거냐? 내가 무슨 사람을 죽였냐, 아니면 도둑질을 했냐, 나는 법대로 살고 있고, 심지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방인도 있을 것이고, 또 유대인들은, “나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다 외우고 있고, 그 율법의 내용대로 어려서부터 삶으로 지켜오고 있다. 나는 이방인들과는 다르다.”라고 주장하기도 할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이처럼 예상되는 항변에 대해 바울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부분이 자주 나오는데요, 그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읽은 3장 전반부는, 특별히 유대인이 제기하는 반론에 대한 바울의 재반론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대화에는 대략 네 가지 정도의 반론과 재반론이 등장하는데요, 우선 1~2절에는, 유대인이 그럼 나은 게 뭐냐, 하는 반문이 나옵니다. 2장 마지막 부분에서, 속사람이 유다이오스인, 속사람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 진짜 유대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겉으로 유대인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대체 무슨 유익이 있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 택하신 역사가 구약의 4천 년 역사와 토라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며, 이방인보다 나을 게 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 유익이 범사에 많다고 2절에서 언급을 하는데요, 여기 ‘범사에’라는 말은 ‘모든 면에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유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많다는 것인데, 그 유익의 내용에 대해서는, 나중에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로마서 9장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대략 일곱 가지 정도로 세부적인 설명을 하는데요,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언급을 하지요. 2절에 보면, ‘우선은’(2절)이라는 말[프로톤 멘]이 나오는데, ‘첫째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유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조금 더 나중에 하도록 하구요, 다음으로 3~4절에서는, 조금 표현이 어렵습니다만, 쉽게 말해서, 유대인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다면, 이제 그 언약은 파기되어 버리는가, 하나님도 더 이상 언약에 신실하실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유대인 누군가가 하게 될 텐데, 거기에 대해 바울은 4절에서 [메 게노이토!]라는 표현을 써서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지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매우 강한 부정으로, 바울이 이런 대화 형식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앞에 아무리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취소되거나 포기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이신 것은, 지금 하나님은 유대인을 포기하고 다른 백성을 통해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시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언약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그런 언약이기 때문이다, 말합니다. 5절은 세 번째 예상되는 반론인데요, 그렇게 만약 이스라엘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유지되고, 또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면, 우리의 잘못이 뭐가 그리 대수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이유가 없지 않느냐, 질문합니다. 네 번째 반론에 해당하는 7절과 8절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요. 곧 유대인의 실패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더욱 드러내고 확장시키는 것이라면, 오히려 잘 한 일이 아닌가? 즉 이스라엘의 죄가 복음을, 예수를 가져온 것이라면 유대인의 그 죄와 불의야말로 가장 잘한 일이라고 칭찬받을 만하지 않는가?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질문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신학적으로는 할 수 있는 질문이겠지만, 사실 너무 멀리 간 궤변이겠지요. 말도 안 되지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우리가 굳이 불효자가 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인간의 죄가 비록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게 한다고 해도 그 죄는 정당화될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9절에 보면, 유대인도 나을 게 없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모두 죄 가운데 있다고 결론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결론이 앞의 2절의 내용과 상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익이 있다고 강조했는데, 여기서는 결국 다시 유대인이 말씀을 가지지 못한 이방인보다 나을 게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의 율법[토라]을 주셨다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다면 어떤 구체적인 유익이 있을까요? (*) 많은 유익이 있지만, 오늘 본문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하고 절대적인 유익, 그것은, 본문 20절의 말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처럼, 바로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말씀을 맡은 가장 본질적인 유익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죄를 깨달은 다음의 스토리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나의 의로움과 실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일컬어 예수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인도자라고 부릅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향하게 되는 거지요.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입니다. 그것을 다 지켜서 완전한 백성이 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율법을 안다고 율법을 행할 수 있는 게 아님을, 하나님도 아시고, 다윗과 같이 거룩함을 사모했던 이들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율법을 범했을 때 해야 할 여러 제사와 정결의 예식을 따로 만드신 겁니다. 오죽하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모두를 회개하는 기도가 있고, 부지중에 범한 죄를 대속하는 제사가 따로 있겠습니까? 율법은 내가 그런 존재임을, 내가 죄인이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한 발 더 다가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요. 뭐가 문제인지를 안다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대단한 유익이지요.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세상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왜 실패를 반복합니까?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잘못하는 것,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고 지적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대단한 보상을 받습니다. 소위 컨설팅이라는 게 그런 거지요. 문제를 알아야 답을 찾는데 그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알 수 없도록 인간이 망가져버린 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목회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문제를 드러내신 겁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을 내리시는 겁니다. 엄청난 유익이지요. 너무나 큰 유익이에요. 이제 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기만 하고, 그 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내가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그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 은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유대인들의 가장 큰 특권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이지요. 그 율법을 다 지키고, 더 세부적으로 만들어 더 완전히 지킬 생각을 한 겁니다. 좋습니다, 좋은 의도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럼에도 다 지킬 수 없고, 다 지키기는커녕 이방인보다도 못한 모습일 때가 너무나 많은데, 그러한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는 아무런 자각이 없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저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며 정죄하는 데 율법을 사용하고 만 겁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도, 그것이 자신들을 위한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에서 계속 유대인들을 향해 외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가 바로 우리다.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 필요했다. 소리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이 없어도,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아예 모르는 민족이나 나라도 나름의 법과 윤리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죄, 다른 많은 죄들을 만들어내는 더 근본적인 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죄, ‘하나님을 향한 죄’라는 문제입니다. 성경이 규정하는 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문제에 걸려 있습니다. 십계명 중 앞의 네 가지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행하는 죄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짓는 죄에 대해 더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그게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는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간다는 뜻이고, 그 관계에 눈을 뜬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법이나 윤리와 무관하게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착하게 살면서도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도 없지만, 논리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왜요? 그분은 인격적인 존재로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고, 우리에게 그 관계 안에서 충실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정 밖에서 아주 훌륭한 평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품도 좋고, 누구에게나 젠틀하며, 능력도 있어 일도 잘 합니다. 그런데 그가 집에만 돌아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완전 엉망진창입니다. 늙은 부모를 무시하고 함부로 합니다. 아내에게도 진실하지 못합니다. 공식적인 외도만 안 했을 뿐, 늘 아내를 외롭게 합니다.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없고, 대화는 주로 언어적인 폭력에 불과합니다. 밖에 나가면 누구나 좋아하는 능력 있고 젠틀한 사람인데 집에서는 이렇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 그 가족들에게, 부모와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토라를 보면, 죄를 규정할 때, 그 죄가 일어나는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관계적 비중이 죄의 크기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는 겁니다. 남을 저주하고 한 대 때리는 것과 부모를 저주하고 한 대 치는 게 같은 죄입니까, 다른 죄입니까? 완전히 다릅니다. 남을 때리면 나도 한 대 맞고 그만이지만, 부모를 저주하거나 때리면, 사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것,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은, 이 문제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주중 QT 본문 말씀에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걸 봤습니다(출애굽기 34:14). 질투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칸나]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지요. 이 이름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는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의미심장하지요. 너네 착하게 잘 살아라, 세상의 본이 되어라, 거룩해라, 이런 이야기 이전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당신을 진실하게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질투하는 여호와라고 밝히며 말입니다. 여러분 질투해 보셨지요?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강한 감정인지, 얼마나 큰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인지 경험해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솔로몬이 말한 대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지옥]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아가 8:6) 모든 것을 태워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질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그런 관계 속에 계십니다. 그럼 여러분, 혹시 하나님께 질투를 느끼십니까? 사실 질투가 없다는 건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무관심이지요. 아니면 상대의 사랑을 일상화시켜버렸다는 뜻도 됩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해도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 우리 마음에 이미 이 마음이 자리를 잡고, 우리의 행동을 지배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그것이 무관심이든, 무시이든, 감정적 폭력이든, 그런 우리의 태도는 분명 하나님께, 다른 세상적인 죄와 불의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질투하시는 존재라면 말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전하시려는 진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습니까? 이러한 관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진심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경외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의인인 척 흉내를 내고, 또 일부 성공도 했겠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는 너무나 불의하고, 너무나 교만한 그런 존재였던 겁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그럼에도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릅니다. 이미 율법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은 지가 오래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식으로 예수 믿지 않으십니까? 율법적으로, 할 것들만 최소한으로 하고, 하지 말라는 건 가급적 안 하면서, 그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만 힘을 쏟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밖에서만 인정받으려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일상은 아닙니까? 사실 이방인인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더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명확한 개념과 인식 없이 용서를 먼저 배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격과 성품이 겉으로 잘 변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겁니다. 율법을 다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도록,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인격이시며, 질투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행동과 태도로 인하여 근심하고 기뻐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느낄 수 있도록 성령이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지금도 여러분 안에 말씀하고 계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죄를 범할 수 있는지, 또 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떤 것인지, 온전히 깨닫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의 관계 밖에서, 세상에서 의인이 되고, 탁월한 자가 되려고 하기보다, 내 아버지요, 내 신랑이요, 내 주요, 내 가장 친한 친구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먼저 온전하기를 위해 애쓰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비록 세상에서는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서만은 신실한 자요, 권능 있는 자요, 영향력 있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맛보고 누리는 그런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그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더하시고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 설교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