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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2017년 7월 30일 주일 설교

2017-07-3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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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30 오순절 후 여덟 번째 주일 설교 ---------------------------------------------------------- 로마서 2장 12~24절,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70730.mp3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성 파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첨부 파일을 클릭하시면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8) 본문 23절의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제목으로 삼습니다. 이 말씀의 가르침이 우리 모두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2장 1절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불렀던 그 사람, 남을 판단하지만 자신도 같은 일을 행함으로,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바울이 심중에 누구를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오늘 본문에서 드러나게 되는데요, 여러분, 그가 누구입니까? 네,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오늘 그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고발은 아주 날카롭고 신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토라]를 잘 알고 자랑하고 심지어 이방인들에게 가르치는 그들이, 실제로는 그것을 범하고 있다고, 그래서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 그리고 말씀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선언한 겁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발은 사실 비난이나 정죄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며, 그 중에서도 율법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고,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자신이 대신 지옥에 가더라도 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얻기를 간절히 소망할 만큼,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정죄가 아닌 비난이 아닌 이 고발의 목적이 무엇인지 거기에 우리의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발의 절정이 본문 24절에 기록된 이 선언입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모든 ‘자기 의와 정체성’은 소용없게 되어 버립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 우리 성도들도 이러한 말이 제일 두려운 부분이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말은 훨씬 그 이상입니다. 본래 이 구절이 기록된 책은 구약 이사야 51장이라고 오늘 본문 아래 주석에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그 본문을 찾아보지 않아도, 당시의 역사적 맥락은 여러분이 충분히 예상하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 51장이면 유다가 멸망하고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의 이야기이지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당한다는 것은, 그때 유대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전쟁에서 졌다는 뜻이고, 그를 예배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며, 여호와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이방인의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당신의 백성을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이 조롱과 비난을 당하시고 감수하신 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는데 망할 리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가 망했을 때 당하는 하나님의 모독보다 성도의 죄와 불의를 통해 당하는 모독이 더 크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가 세상에서 망하는 것, 그래서 당신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을 우리처럼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어쨌든 오늘 로마서의 현재 상황은 이러한 이사야 51장의 상황과는 매우 다릅니다. 물론 지금도 이스라엘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잡혀갔던 포로들은 다 돌아왔고, 성전은 그때보다 훨씬 아름답고 웅장하게 복구되었고, 예루살렘 성벽도 다 다시 쌓았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선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은 17절 말씀처럼, 율법을 의지하고, 자랑합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들은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따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근거가 바로 이 율법입니다. 당시 세계에는 없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체계적인 종교적 교리와 삶의 기준들이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 모든 민족 중에서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그때까지 당신이 누구시고,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오직 히브리인들에게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과만 소통하셨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뜻과 진리와 선함에 대해 눈을 떴습니다. 오늘날도 구약의 토라를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이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고 있는데요, 그런 진리를 유대인들이 수천 년간 독점했습니다. 지금도 귀한 그 말씀을 수천 년 전부터 가졌으니, 대단한 거지요. 진리에 대한 이 배타적 소유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고, 그 값어치는 사실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정보의 가치가 곧 권력이고 돈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정보가 진리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19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처럼,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자신들에 대한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게 됐습니다. 19절부터 보시면,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 어둠에 있는 자의 빛, 지식과 진리의 모본(전형)을 가진 자, 어리석은 자의 교사, 어린아이의 선생 등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모두 중간기 유대인 문헌이나 외경 속에 나오는 표현들입니다. 본문 20절의 ‘어린아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네피오이’인데, 말 못하는 사람, 글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어린아이가 ‘infant’인데, 실은 이 말도 같은 뜻입니다. 라틴어 in-fans에서 온 건데, 문맹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모든 이방인들이 사실 실질적인 문맹이라고 주장하고, 스스로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요, 빛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들이 가진 토라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부심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면서 오히려 더 강해집니다. 그들의 다른 자부심들이 다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나라는 망했고 백성은 포로가 되었으니, 유대인들에게 남은 게 뭡니까? 딱 두 가지, 토라와 할례입니다. 그들이 머리와 가슴에 간직하고 있어서 빼앗길 수 없는 토라, 날마다 암송하며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토라, 세상에 모든 토라의 문서가 다 태워진다 해도 영원히 그들 안에 살아 있을 토라, 그리고 그들 몸에 새겨진 할례, 지워지지 않는 그 영원한 언약의 흔적, 이것 두 가지가 그들이 가진 마지막 종교적, 민족적 자존심인 겁니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거치는 그 고통스런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도 그들은 그래서 자기들만의 신앙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모든 자부심의 기초가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2장에서 바울은 바로 그 두 가지를 걸고넘어집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마지막 자존심, 토라와 할례, 그 두 가지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자랑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진노를 막아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 자부심은 스스로의 믿음일 뿐,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여전히 모독을 받고 있다고 선언해 버립니다. 가장 큰 문제가 19절 맨 끝에 있는 한 구절입니다. 바로 ‘스스로 믿으니’입니다. 빛이요, 인도자요, 교사요, 그렇게 대단한 모습이라고 남이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믿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가 엄청난 반전이지요. 이 말을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인 바울이 하고 있어서 더 뼈아픈 반전입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저 무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선적이기까지 하다는 비판이기에 더 뼈아픕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많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극심히도 혐오하고 심지어 바울 죽이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도 봤습니다. 왜 그토록 바울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을까? 어째서 유대인들은 그냥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무시해 버리지 못하고, 결국 미워하고 혐오하여 죽이려고까지 했을까? 그 답이 여기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율법과 할례는 그들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없으면, 그게 인정되지 않으면,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민족적, 종교적 ‘내부고발자’였던 겁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유대인들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립니다. “너희가 율법을 가진 그것이 아무 자랑이 될 수 없다. 율법은 그대로 순종하여 행할 때에만 자랑이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랑하고 가르치는 대로 행하고 있지 않다. 그런 너희의 현 상황은 완전한 불의이며, 실패다. 한 마디로 너희는 이방인과 똑같다. 그럼에도 율법을 자랑한다면 너희는 이방인보다도 못하다. 불의한데다가 위선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로 인해 모독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니, 아, 정말 유대인들은 바울이 너무너무 싫었을 겁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던 대로 이것은 유대인을 비방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얼마 전까지 바로 그 자리에 있었고, 그는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끈질긴 사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직접 예수님을 만나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유대인의 허를 찔러 치명상을 입히는 유일한 이유는, 유대인을 정죄하고 포기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단 한 가지 목적입니다. 오직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무능한 현실과 실패를 인정하고 예수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들아, 도대체 왜 그렇게 율법대로 순종하지 못하느냐, 이게 아닙니다. 이미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님을 통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스스로 순종하지 못하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이 준비한 예수라는 최종적인 대안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2장의 목적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진노 아래 있음을 선언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본문과 말씀을 들으면서, “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있구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지 않게 해야지.” 물론 좋은 마음이지만, 그게 이 본문의 목적은 아닙니다. 너무 멀리 간 거지요. 지금 유대인들에게,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울의 이야기의 우선순위는, 일단 실패한 자신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은 그 후에도 그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 거기서부터 복음이 시작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정말 문제가 뭐냐 하면, 자신들의 불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확신과 자랑을 고치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소유한 율법, 내가 완전히 외우고, 알고 이해하고 있는, 그래서 남들을 가르칠 수도 있는 그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곧 나의 실력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을 소유한 그 자체는 처음부터 실력이 아니었답니다. 율법은 그것을 행할 때에야 비로소 실력입니다. 알고 있고 가졌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행하지 않는다면 없는 것이나 똑같은 게 율법입니다. 비싸고 좋은 참고서 있다고 그 자체가 실력이 아니고 그것으로 공부를 해서, 결국 문제를 잘 풀어야 실력이듯 율법은 지켜야 실력인 겁니다. 이방인 중에서는 참고서 없이도 공부를 잘 하는 그런 이방인도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진 걸로는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 실력이 자신들에게는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그들의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준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던 겁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그 실력이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행위가 기준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문제지만, 그보다 감춰진 것, 마음속의 것, 은밀한 것이 더 중요한 실력이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외면하고 싶었던 율법의 가장 어려운 부분, 모세로부터 수많은 예언자들이 강조했던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마음의 할례, 마음의 순종, 마음의 거룩함을 이루는 그것이 진짜 실력이라는 겁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그것이 곧 간음이라 하시고, 남을 미워하는 그것이 곧 살인이라 하십니다. 우리는 아니지요. 법과 상식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살인은 살인이고 미움은 미움입니다.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물론 미움은 살인을 위한 씨앗에 불과하고, 살인은 그 미움이 싹을 틔워 쭉쭉 자라 맺은 최종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열매이지요. 여기서 세상은, 율법은, 그 열매만 보지만, 하나님은 그 씨앗 자체를 보신다는 겁니다. 왜요,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다면 인간은 모두가 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 씨앗 속에 열매의 본질이 들어 있습니다. 그 씨앗이 뿌려지면 결국 열매는 거둬집니다. 미움이 살인으로 가지 않는 걸 실력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 자체도 내 실력이 아니라 그것 가운데 개입하시고 막으시는 하나님의 실력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그 씨앗이 이미 온 마음에 뿌려졌다는 것이고, 이제 남은 방법은 그 밭을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운 씨를 심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남들과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도 이러한 씨와 열매 사이에서 교묘하게 남을 정죄하고 나를 자랑합니다. 나는 아직 씨앗일 뿐이고, 남들은 다 열매라고 정죄하지요. 아니요, 하나님은 둘 다 똑같습니다. 얼마나 자라고,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가, 그 차이일 뿐, 이미 죄의 씨앗이 뿌려졌고, 열매는 예정되어 있으며, 그 결과는 동일한 심판입니다. 성도는 그래서 절대로 겉을 기준으로 삼고 남을 정죄하고 나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 이면에 놓인 그들의 불의와 죄악을 직시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실력 없음과 실패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붙잡으라 하십니다. 여러분,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 진짜 의미가 있으려면, 일단 내 실패와 한계가 보여야 합니다. 내가 괜찮은 존재라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게 아니라는 걸, 내 실력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곱씹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십자가가 의미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오직 병든 자에게만 쓸 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건강한 자입니까, 병든 자입니까? 혹시 상대적으로 건강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는 건강하다? 그게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 죽을병입니다. 진통제를 왕창 먹고,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을 보며, 이래라 저래라 의사 노릇하는 환자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죽습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런 겁니다. (바리새인이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누가복음 18:11) 이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남과 비교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비교와 상대적인 의로움으로 자신이 병자가 아니라고 착각한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이미 죽을병입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병입니다. 자신이 아픈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그와 비슷합니다. 내가 악해도 나보다 더 나쁜 인간을 보며 스스로 위로하고 심판을 부정합니다. 남이 죽을죄를 지었다면 나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하나님은 그 마음이 더 악하고 심각한 질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질병이 우리를 영원히 예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유대인들이 가진 그 아무 소용없는 그 비교의 근거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중입니다. 자기의 실력 없음과 그로 인한 수치를 가리기 위해 애써 붙들고 있는 것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그 무화과 잎사귀처럼, 그렇게 붙들고 서 있는 율법과 할례를 태워버리시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사귀를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진짜 옷을 입을 수 있었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또 저와 여러분도, 나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덮어 쓴 모든 인위적인 잎사귀들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의’라는 진짜 예복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으셨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만 그럴싸해 보이는 위선적인 고상함이 아니라, 남과의 비교로 얻은 상대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우심으로 거룩하게 옷 입으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믿음으로 그 옷매무새를 고쳐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금방 의로워지고 선해지지는 않습니다. 많이 달라진 줄 알았던 아브라함이 20년 동안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왜요? 아브라함은 자기 실력을 압니다.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자신을 택하시고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내 능력과 내 의로움과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그가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고도 실력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냥 좋은 참고서나 실력 좋은 친구가 아닙니다. 정답을 옆에서 불러주는 선생님이고, 당신과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하실 수 있는 그래서 당신의 실력이 우리의 실력이 되게 하실 수 있는 그가 24시간 내 옆에서 대기 중입니다. 물론 그래도 실력 없는 학생도 많겠지만, 이미 밭은 갈아엎어졌고, 새로운 씨가 심겼습니다. 믿으십니까? 크게 아멘, 하십시오. 저와 여러분 안에 뿌려진 그 진리와 사랑의 씨앗이 반드시 자라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삶 속에 맺혀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실 겁니다. 여러분의 실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실력으로 우리의 삶에 임한다면 말입니다. 거룩한 진짜 실력으로 세상 가운데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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