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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너그러워서' 2016년 9월 11일 주일 설교

2016-09-1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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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오순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7장 10~15절, 더 너그러워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911.mp3 (사도행전 강해 123) ‘더 너그러워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습니다만,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풀어’ 증언한 것과 같이, 저희도 지난 3주 동안,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눴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해 받으심과 그를 믿는 성도들이 처한 고난의 현실에 대해 함께 상고해보았고, 지난주에는 그런 고난의 현실이, 우리가 증인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3주 만으로 교회와 성도의 고난이 충분히 다뤄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그 다음 여정을 계속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 다음 메시지를 향해 일단 더 전진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100여 km 정도 떨어진 베뢰아라는 도시로 이동합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 여정 역시, 바울의 의지와 선택이라기보다는, 피할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을 잡으려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을 피해서 형제들이 급히 바울의 야반도주를 감행한 것이지요. 아마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분명 늘 로마였을 텐데요, 이렇게 베뢰아로 피신했다는 것은, 일단 이번 여정에서는 로마에 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번 여정의 끝은 결국 로마가 아닌 아테네 쪽임을 예상해보게 합니다. 정치의 중심이 아닌 사상과 문화의 중심으로 먼저 복음이 전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은 바울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여기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아주 외진 곳입니다. 마게도니아 지역에서 가장 작은 도시 중 하나이죠. 큰 도시였던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 비한다면, 그냥 시골 마을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바울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지체들이, 사람들의 왕래와 이목이 그나마 덜한 곳으로 일단 급히 피신시키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비록 가장 작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뢰아는, 이번 마게도니아 지역 전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열매가 나타난 곳이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고, 헬라의 귀족들도 적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이전의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또 앞으로 아테네, 이런 큰 도시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온 적대자들을 피해서, 바울이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아테네로 이동하게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입니다.  본문은 그런 베뢰아의 풍성한 열매가 그곳 사람들의 태도, 특별히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서 기인했다고 기록하는 것에 우리는 주목하게 됩니다. 본문 11절이지요.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기에,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더 너그럽다(유게네스테로이)’, 이렇게 비교급으로 사용된 걸 보면, 데살로니가 사람들 역시도 너그러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실제로 데살로니가전서(2:13)에 보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모습을,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는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비교적 짧은 시간인 3주 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한 이유 역시 어느 정도는, ‘말씀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보다 더 너그러웠습니다. 여기 너그럽다는 말은, 우리말 표현에서처럼,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는 의미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이 단어를 예전 한글 성경에서는 ‘고상하다’ 이렇게 번역을 했었는데요, 사실 이 ‘유게네스’라는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출신과 가문, 그 배경이 좋다는 뜻입니다(‘유’는 좋다, ‘게네스’는 출신) ‘노블레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분에 맞는 ‘노블레스’한 태도와 행동을 할 때, 주로 이 단어를 썼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자세, 그리고 그 사람 말의 진위를 이성적으로 잘 분별하는 것, 그것을 당시 헬라 문화에서는, ‘유게네스’하다, 고상하다, 너그럽다고 표현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본문 12절 후반부에 그 단어의 의미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우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이고, 또 받은 그 말씀이 정말 그런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가 함께 균형을 이루는 것, 그것을 누가는 오늘 ‘너그럽다’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쉽게 생각해 보면, 간절한 마음은, 말씀을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겠고, 과연 그 말이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이성의 차가운 분별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이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요구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11절에 ‘말씀’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 설교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단지 설교만이 아니라, 우리가 늘 묵상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을 통해 선포된 설교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으로 믿고 묵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거나, 또 지금처럼 설교를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간절한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이 말씀을 내가 반드시 잘 듣고 먹어야지…. 이 말씀, 너무너무 고팠다…. 잘 먹어야지….’ 하는 마음 있으십니까? 또 그 말씀을 여러분의 이성과 판단을 사용해서 열심히 상고하고 연구하는 그런 냉철한 마음도 있습니까? 주일에만 듣고 그냥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한 주 일상 동안 ‘날마다’, 그 말씀과 설교를 다시 읽으면서, 정말 그러한가, 또 내 삶에도 정말 그렇게 역사하시는가, 여러분 스스로 상고하는 수고를 감당하십니까? 중요한 건, 이 두 가지의 태도가 모두 성도에게 꼭 필요하고, 결국 그 사람의 신앙과 열매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오늘 본문이 강조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마음인 것 같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말씀 그 자체가 너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냥 공짜로도 얻을 수 있는 책이 되었고, 또 설교는 거의 무한하다 할 만큼 인터넷 공간 안에 넘쳐납니다. 본래 간절함은 결핍에서 기인하지요. 뭔가 없어야, 부족해야, 간절함이 자연스럽습니다. 넘치고 풍성한 상황에서 간절함이 있으려면, 거기엔 별도의 노력과 수고, 또 무언가 다른 관점이 첨가되어야만 합니다. 언젠가 중국 지하교회 성도들이, 어렵게 중국어 성경책을 전달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중국 교회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기도했습니다만, 선교사님이 가져 온 보자기를 풀고, 그 안에서 대충 제본된 성경책을 꺼내 성도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자, 거의 모든 성도들이, 마치 주님을 만난 것처럼, 그 성경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듯 그렇게 간직한 성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몰래 숨죽여 읽는 그들의 간절함이 눈에 선합니다. 사실 여기 본문에 ‘말씀을 받고’의 ‘받는다’는 말은 그냥 ‘receive’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데코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격적 존재를) 영접한다, 환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받는다’는 말 안에도 이미 간절함과 뜨거움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지요. ‘날마다’도 마찬가집니다. 다 간절한 열정의 표현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충분히 넉넉하기 때문에, 그 마음은 사실 우리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읽고, QT를 하면서 그런 감격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목사인 저의 설교를 들을 때도 간절함은 사실 조금 먼 이야길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못 들으면 다음에 듣고, 또 인터넷으로 읽어도 되고, 아니면 더 훌륭한 설교자의 메시지를 찾아서 들으면 됩니다. ‘풍요 속 빈곤’이라고, 말씀을 향한 간절함은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간절함으로 사모하는 것, 이것은 보통 처음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간절함이란, 내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하나의 은혜인 것이지요. 물론 간절함은 고난과 결핍에서 탄생하고 새로워집니다. 호세아서에서(5:15)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들(내 백성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고난 가운데 있으면, 늘 평범하기만 하던 하나님 말씀도, 귀하디귀한 생수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늘 고난을 자처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또 그 가난한 마음이 내 안에 생길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부자가 스스로 가난하게 되기를 그냥 바라고만 있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듯, 말씀을 향한 간절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간절함을 바라는 간절함입니다. 가난한 마음이 되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습관을 따라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요. 내가 귀히 여기기를 애쓰면, 내 안에 정말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열정이 ‘날마다’의 습관을 낳기도 하지만, 때론 습관이 열정을 낳기도 하는 겁니다. 내가 청년 시절에는 뜨거웠고, 말씀도 사모했다고 말씀하시는 어르신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시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간절함을 사모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뜨거워지는 것, 그것이 간절함이 아니라, 그것을 사모하고, 유지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간절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간절함을 위해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갈망을 기록한 시들이 참 많은데요, “…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말씀을) 즐거워하였나이다. …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이런 시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요, 하나는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들은 알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한 문제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사랑을 느끼는 게 다 제각각입니다. 누군가는 칭찬과 인정을 통해, 누군가는 시간과 물질을 통해, 또 누군가는 신체적인 touch를 통해, 또 누군가는 내가 싫은 것을 남이 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또 누군가는 내가 원하는 것을 힘써 노력해줄 때, 그럴 때 사랑을 느낍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씩 다 다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 사랑받고 계시다고 느낄까요? 우리가 어떠할 때 하나님은, ‘그래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이렇게 느끼시고 기뻐하실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할 때,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가장 깊은 사랑을 경험하십니다. (*) 그래서 하나님과 깊이 교제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헐떡거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고백하고 싶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행하고 순종하는 그 과정을 간절함으로 누렸던 것입니다. 말씀을 향한 간절함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고난과 결핍을 통해서이기를 원치 않는다면, 간절함을 사모하는 간절함으로 성령을 구해야 하고, 그것을 날마다의 습관을 통해 자신의 몸과 삶에 새겨 넣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는 강한 열망을 구해야 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스스로 맛보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이 일평생 늘 간절함과 뜨거움이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젊은 시절의 진리를 향한 열정이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붙게 되고, 여러분의 인생 내내 그 진리의 빛이 활활 타오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간절함이 말씀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라면, 말씀이 그러한가 날마다 상고하는 것은, 말씀을 향한 차가운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너그러움, 고상함은, 말씀을 향한 간절함에 더하여, 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지성과 이성을 사용하여 차갑게 상고하는 것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사실 설교나 말씀을 들을 때, 격앙된 어조의 ‘아멘!’이 계속 이어지는 그런 교회가 참 많습니다. 사실 우리 교회 지체들은 좀 차가운 편에 속합니다만, 제가 청년 시절까지 몸담고 있던 교회에서는, 설교 시간에 뜨거운 아멘 소리가 늘 교회 안에 메아리쳤습니다. 물론 저도 나름 설교에 집중하고, 열심히 큰 소리로 아멘을 잘 하는, 그래서 목사님의 기쁨이 되는 그런 청년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실 설교자에게는 그 아멘 소리만큼 힘이 되는 것도 없습니다. 성도의 아멘이 좋은 설교자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저희 목사님께, 더 많이 칭찬해드리고 감사했다고 말씀드리지 못한 게, 목사가 되고 보니, 참 죄송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균형이 무너지면, 그래서 뜨거움이 차가움을 삼켜버리면, 그 뜨거움마저 미지근해져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멘을 아무리 남발해도, 그것을 스스로 천천히 곱씹고 또 씹어서, 소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의 영혼에 아무 유익도 남지 않습니다. 아멘은 출발점이지 결승점이 아닙니다. 아멘, 했으면, 그때부터 상고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고가 다 끝난 뒤, 최종적인 아멘이 뒤따라야 하지요. 아멘, 이 한 마디로 내가 들은 모든 말씀에 대한 반응을 소위 ‘퉁 치면’ 안 됩니다. 정말 그 말씀이 그러한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상고하는 어려운 수고를 ‘아멘’이라는 간편한 호응으로 대체해서는 안 됩니다. 상고한다, 이건 그냥 가벼이 읽는 게 아닙니다. 그냥 눈으로 쓱, 지나치며 읽는 게 아니라, 기록하며 고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일반도서나, 자기 전공서적보다 가볍게 대하는 건, 한국교회가 가진 깊은 병폐 가운데 하나입니다. 잘 모르는 건 찾아보고, 연구하고, 물어보고, 기도하면서, 그 말씀의 의미와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분별해 가야 합니다.     물론 사람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SNS를 비롯한 internet 공간의 contents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이런 북석적인 상고는 사실 대단히 낯선 방식이라는 걸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상당히 무뎌졌고, 둔해졌습니다. 우리의 독서력 자체도 매우 피상적이고 초보적이 된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 함께 공부하는 ‘나를 따르라’ 같은 책들,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은 어려운 책도 아닙니다. 너무 쉬운 것들만 읽어온 결과이고, 너무 쉽게 읽어온 결과입니다. ‘뭐 그런 어려운 책까지 읽어야 하는가’, ‘뭐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며 배워야 하는가’, 이런 생각은 전혀 너그러운 마음이 아닙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런 모습은 오히려 천박하고 옹졸한 태도입니다. 진정한 고상함은, 일평생 말씀을 열심히 상고하는 태도입니다. 믿으십니까? 목사의 도움 없이는 성경과 설교와 신앙 서적에 대한 바른 이해와 분별을 어려워하는 모습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실은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 개신교가 세워졌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언제나 아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바울의 설교도 아멘 뒤에 상고했습니다. 당연히 저의 설교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확인하셔야 합니다. 본문의 상고한다는 말 ‘아나크리노’는 일차적으로 ‘질문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묻는 것, 의문을 가지는 것, 懷疑하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다시 질문하고, 또 다른 책들에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도, 교회도, 성도도 모두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상고하는 것, 하나님을 향해 질문(아나크리노)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어려울 때, 그리고 잘 분별하기 어려울 때, 그때 가장 필요한 태도가 바로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묻는 것이 말씀을 상고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이건 좀 어렵고 낯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경험을 비추어 볼 때, 말씀을 상고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온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말씀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기에, 성령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대화하며 읽을 때 가장 정확합니다. 사실 QT를 함께 하며 늘 조심하는 부분이 이 대목입니다. QT는 기도와 함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우리는 진리에 이를 수 없고, 성령의 교정 없이는 바른 결단에도 이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그냥 좋은 책으로 읽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질문하며, 그 답에 귀를 기울이며 읽는 모습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당장 답을 주시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고 긴 시간이 필요한 때도 있지만, 제 경험으로는, 결국은 하나님이 답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 없는 말씀의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칼날을 남을 향해 겨누게 만듭니다. 대단히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차가움으로 말씀을 연구해야 하지만, 그 차가운 칼날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라는 칼집 속에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합니다. 아멘이십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서두에 마게도냐의 여러 지역 가운데 특별히 베뢰아의 열매가 풍성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도 있었지만, 그 은혜에 반응하는 그곳 사람들의 너그러운 모습 때문이었음을 보았습니다. 너그러움은 간절함과 날마다의 상고가 균형을 갖추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뜨거움과 우리에게 주신 지성으로, 그것이 정말 그런가, 맞는 말씀인가, 늘 분별하려는 노력이 우리를 천박하지 않은 고상한 성도가 되게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말씀이 뿌려진 네 가지 밭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길가, 바위, 가시떨기, 그리고 좋은 땅, 이렇게 다른 땅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은 결국 하나의 밭에서만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모두 자라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 열매는 좋은 밭, 고상하고 너그러운 밭에서만 맺힙니다. 이것은 실은 무서운 비유입니다. 나머지 다른 밭에서는 아무 열매도 나지 않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모두 다 하나의 밭, 좋은 밭에서 모두 나옵니다. 나머지 밭에서는 아무 소출도 없습니다. 그게 하나님나라, 그게 천국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에게서 조금씩, 조금씩 열매가 맺혀서 풍성해지는 게 아니라, 복음은,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기름진 밭 한 곳에서만, 모든 풍성함이 다 거두어집니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고, 있는 자는 더 많아 풍성해지는 것이, 말씀과 은혜의 신비라는 것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간절한 마음, 상고하는 마음으로 좋은 밭이 되십시오. 그래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 된 삶이 되십시오. 너그러웠던 데살로니가, 더 너그러웠던 베뢰아였다면, 저와 여러분, 고백교회가, 가장 너그러운, 가장 고상한 성도와 교회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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