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해를 받고(3)' 2016년 9월 4일 주일 설교

2016-09-0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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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4 오순절 후 열여섯 번째 주일 설교 --------------------------------------------- 사도행전 17장 1~9절, 해를 받고(3) * 설교 음성파일 : (사도행전 강해 122) ‘해를 받고(3)’라는 제목으로,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금껏 전도를 하다가 제가 받은 질문 가운데 가장 날카롭고 당황스러웠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왔다는데, 도대체 세상은 왜 이렇게 달라지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들었던 질문이었는데요, 실은 이것은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제기했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데, 도대체 메시아가 어디 왔다는 것인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나중에는 이방인들이, 이 질문을 기독교인들에게 던졌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나라 왔다, 이렇게 선언하셨는데, 왜 여전히 이 세상은 지옥과 같고, 천국을 누리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인가?” 복음 전하는 이들에게 세상은 반문했습니다. 물론 오늘도 그 질문은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던져지고 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기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본문의 바울이 살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 질문을 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들의 삶과 교회를 가리켰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자유하며, 천국을 누리며 살고 있는지, 그들은 자신의 삶과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증언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메시아가 정말 왔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너희들에게 천국이 온 것은 맞구나. 너희는 정말 그 메시아의 나라를 살고 있구나. 그 나라의 법대로 살고, 믿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예수의 명령을, 너희는 기쁨으로 살아내고 있구나.’ 인정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그리고 그가 살고 죽으신 그대로, 성도들은 살아냈습니다. 구타를 당해도 반박하여 때리지 않고, 남에게 물건을 빼앗겨도 법으로 송사하지도 않고, 누가 무엇을 달라 하면 거절하지도 않고, 그렇게 우리가 읽는 이 말씀 그대로 살면서, 그들은 그 어려운 질문에 대해 참으로 명쾌한 답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들을 보며, 예수를 믿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무슨 선교의 전략이나, 전문적인 전도법, 이런 게 없었습니다. 그저 본문에서 바울이 전하는 모습처럼, 예언된 메시아가 오셨고, 그가 해를 받아 죽었으나 부활하셔서,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에서 구해주셨다는 증언이 있을 뿐이었고, 기쁨으로 그 메시아의 삶을 뒤따르는 이들의 삶의 증언이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고난이 뒤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고, 말씀을 전하는 데도 여러 고난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면,)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세상 모든 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증인이 되어라.” 명령이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는 선언이기에, 증인으로서 당해야 하는 마땅한 어려움들은 처음부터 피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성도가 이 땅에서 해를 받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그가 증인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의 증언자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에, 증언자로 거듭났기 때문에, 고난은 결코 성도를 파해가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이 왜 계속 해를 당합니까? 그가 메시아를 증언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3절 말씀처럼, 뜻을 풀어서, 설명해서, 자꾸만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다니기 때문에, 그가 고난을 당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옆에만 있어도, 그와 함께 하기만 해도, 어려움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야손이라는 사람이 그런 경우입니다. 바울 옆에 있다가, 바울과 동역하다가, 바울을 먹여주고 재워주다가, 바울 대신 끌려가 고초를 당합니다. 증언이란 언제나 고난을 동반하지요.     증언하지 않는다면 성도는 특별히 고난당할 일이 없습니다. 점잖고 젠틀하게, 그리고 쿨 하게,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제일 불쌍하게 믿는 이유는, 그들이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믿거나, 말거나, 뭘 믿거나, 모두가 다 잘 될 거고, 천국 갈 거고, 각자 믿는 모든 것이 다 의미 있다고, 그렇게 신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 쿨 하게 믿을 자유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애초에 없기 때문에, 겉으로 가장 연약해 보이고, 쪼잔해 보입니다. 그게 다 주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세상이 다 당하는 고난 외에, 성도로서의 고난이 없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언어로,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3절 말씀처럼, 열심히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고 증언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바울과 야손에게 있었던 그 고난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고난이 없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기쁨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당하는 고난만 당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에겐 세상이 누리는 기쁨만 있습니다. 전하지 않기 때문에, 천국의 기쁨이 없습니다. 한 영혼이 되살아오는 감격을 기대하지도, 맛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진정한 기쁨과 보람과 천국을 누리지 못합니다. 진정한 천국을 맛보고 누리지 못하니, 세상에 증언할 것도 점점 없어지지요. 맛을 보고 경험을 해야 증언을 할 텐데, 주님을 ‘위한’ 고난이 없고, 주님이 주시는 희락도 없으니, 할 말이 점점 없어지는 겁니다. 그저 우리가 하는 소리가, 주님 도와주셔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들어갔다, 주님 함께 하셔서 질병이 나았다, 주님 역사하셔서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 것밖에 없으니, 세상 그 누구도 우리의 증언에 귀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그건 그들에게도 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증언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제대로 복음을 전할 것인가를 위해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하고 살 수 있을까, 그런 길은 어디 없을까에 초점을 맞춥니다. 초대교회 성도들과 우리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들은 증인이 된다는 대전제 아래서 거기서 오는 고난과 불편을 당연히 여기고, 고난과 더불어, 고난을 이겨내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고난에 대해 먼저 말합니다. 그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증언이 없는 고난을 설교하고, 증언이 없는 고난에 대해 신학적 담론들을 쌓아갑니다. 주중에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살아도 여전히 우리는 고난을 말하고,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는 삶이 켜켜이 쌓여도 우리는, 전 세계적인 고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없이 공허해지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증언이 빠진 고난, 증언을 회피하는 고난, 증언을 살아내지 못하는 고난에 우리가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백교회가 세워진 이유는 고백하고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언어로 증언하고, 삶으로 고백하라고 교회라는 공동체를 주님이 친히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못하니,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 그리고 믿음의 선배들 앞에, 부끄러운 성도들입니다. 입은 닫혀 있고, 삶은 어그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픔으로 신음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여러분에게 참 죄송하고 민망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잘 전하고 열심히 증언을 하려고 해도, 세상이 들을 생각조차 안 하도록, 저희 목사들이 형편없는 삶을 살았고 또 살고 있습니다. 목사들 때문에 성도가 욕을 먹고, 목사들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려는 성도들의 의지마저도 다 꺾어졌습니다. 잊을 만하면 추문이 나오고, 잊을 만하면 여러 불의와 부정에 연루된 이야기들이 불거집니다. 목사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다고 우리가 증인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증인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성도의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도, 성도가 성도 되게 하는 것도, 다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증인이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삶도 신앙도 다 멈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족해도 우리는 증언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아직 미숙해도, 전해야 합니다. 아니 미숙하기 때문에 더 전해야 합니다. 전하려고 해야만 고쳐지고, 전하려고 해야만 새로워집니다. 증인이 되려고 할 때에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부담이 되는 말씀인지 저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삶에서, 직장에서, 친구 관계에서, 또 여러 만남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 참 어렵고 힘듭니다. 솔직히 저도 이 일에 있어서 형편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력합니다. 내가 목사이기 이전에 증인이라는 걸 기억하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고 만듭니다. 실은 그게 중요합니다. 내가 증인임을 인정하고, 그 부담감을 안은 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애써보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한 영혼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해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하고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얼마나 힘썼는가, 그것으로 판단하시지, 나로 인해 몇 명이 교회 나왔느냐, 그걸로 평가하시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 사람마다 느끼는 부담감이 다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전도가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전도가 가장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어느 경우든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말 대신 삶으로 보여주겠다는 마음, 좋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하십시오. 그런데 복음을 말로 전하는 그것 자체가 삶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굳이 침묵이라는 삶을 통해 전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로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 주목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권능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실력이나 삶보다, 복음이 더 능력 있습니다. 말없이 삶으로 하는 증언,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여러분이 그걸 실제로 해 보려고 했다면 금방 아실 겁니다.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말을 했으니 삶이 뒤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전하는지, 말하지 않는 사람이,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건 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말로 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도 바꿔갈 것입니다. 내가 하는 증언에 누가 믿게 될까, 여러분, 섣불리 먼저 판단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이 더 낮은 수준의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걸 더 쉽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잘 나가고, 부요하고, 그런 사람이 여러분의 증언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늘 데살로니가에서 구원 받은 사람,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4절에 보면,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 그리고 적지 않은 귀부인이랍니다. 귀족 가문의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지역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선교지인 베뢰아에서도 그랬습니다. 12절을 보시면,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나의 좋은 배경이나 능력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게 아니라, 말씀의 권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 혹은 나랑 비슷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뭔가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이 부요한 사람을 구원합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남편을 일찍 여윈 한 여자 성도님이 한 기독교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몇 주 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 직장암을 앓던 남편이,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치료 받던 병원의 병실들을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걸 보면서 느낀 걸,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 아내가 쓴 글이었습니다. 일부분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남편은 직장암 말기의 병든 몸으로 전도했다. 남편이 말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고 죽어야 해.”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 모습으로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전도하겠다는 거예요? 거울을 봐요. 예수를 믿고 싶다가도 당신을 보면 도망갈 거예요. 병이 다 나으면 그때 간증하고 전도합시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병이 다 나은 사람만 간증하고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성경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잖아. 병든 사람도 전도할 수 있어.” 그는 다인실로 들어가 환자들 앞에 서서 말했다. “여러분, 저를 보세요. 저는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직장암 말기 환자입니다. 여러분은 입원이라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입니까? 전 지금 기저귀를 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믿기에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어 감사하고, 또 살아도 감사합니다. 아프면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제가 믿는 예수를 여러분들도 믿기를 바랍니다.” “당신, 지금까지 전도를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당신은 전도를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거라고요! 예수를 믿고 암에 걸린 게 자랑이에요? 전도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다 낫거든 해요.” 남편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은 진실함이야.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거야. 그러니 다시 한 번 가보자,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이다.” 1988년, 우리 교회의 총동원전도주일에 남편은 기저귀를 차고 비틀거리면서, 새신자 마흔여섯 명을 데리고 왔다. 남편은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한 영혼이라도 더 전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떠났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귀히 여기셔서, 그가 떠난 지 26년 넘게, 내가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의 믿음을 자랑하게끔 갚아주셨다.] 여러분,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부르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별 볼 일도 없던 사람들을 택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생각과 힘을 의지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무슨 무슨 조건들, 이거면 복음이 좀 더 잘 전해지겠지, 이거면 증언에 효과가 있을 거야, 이런 걸 바울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시지요? 맞습니다. 그걸 배설물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꼭 필요할 것 같은 세상적인 그 무언가, 그걸 바울은 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직접 복음을 전해 보니까, 사람이 정말 구원 얻는 것은, 그런 데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담대한 증인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그겁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말씀을 전하는 성도에게 주신 성령의 권능을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주저하게 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이미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껴지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 그것이 복음이라고 성경이 처음부터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기적과 섭리가 아니고서는 믿어지지 않는 것, 그게 복음입니다. 설득하고 이해돼서, 잘 받아들여지고 감동해서 복음을 믿을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를 의지하지 말고,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리는 것으로 족합니다.     가장 연약한 사람이 그래서 가장 능력 있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 교회마다 전도 잘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사회의 무슨 큰 지위나 역할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잘 나가는 그런 분들은 평생 전도를 한 명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기보다, 인간의 조건과 힘을 의지하기 때문이고, 체면과 남의 이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되지 마십시오. 복음을 신뢰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십시오. 아멘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는 게 왜 힘들고 어려운지 아십니까? 왜 전도라는 말이 그렇게나 우리에게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 되었을까요? 전도만 하려면 왜 그렇게 어색하고, 낯 뜨거워지는지, 혹시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실력이 모자라거나 성경에 대해서 잘 몰라서, 혹은 전도 방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 전도 훈련, 이런 게 있습니까? 사실 증언에는 훈련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전도가 힘든 진짜 이유는, 안 해봐서 그럽니다.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 오랫동안 안 해 와서 그렇습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증인으로 이 땅을 살아간다는 확신과 연습이 부족해서입니다. 날지 못하는 새들, 왜 못납니까? 안 날아 버릇해서 그렇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날지 않아도 괜찮아져서, 그렇게 살다보니, 이젠 아예 그 기능이 퇴화한 것입니다. 날아버릇하면 납니다. 그게 어려운 게 아니라, 익숙하지 않아서입니다. 전도하는 분들은, 그게 그리 어렵지 않답니다. 해 보니, 하고 사니, 늘 하니, 그것이 참 쉽고, 그걸 안하는 게 더 어렵답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증인의 모습, 증언의 능력이 퇴화해버리기 전에, 속히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누구에게 무얼 증언하고, 무얼 이야기해야 하는지, 여러분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무엇보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여러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직업을 가지든, 누구를 만나든,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아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풀어 증언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증인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승전, 증인, 이렇게 가야만 하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본문의 야손처럼, 증인의 보호자가 되는 것도 좋은 비전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가정이 야손과 루디아의 집처럼 사용되기를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소망을 가지고 서원하십시오. ‘주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주님 길을 열어 주십시오. 꼭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기도하십시오. 훗날 선교사님들이 귀국하실 때, 또는 외국 선교사님이 우리나라에 머무실 때, 여러분의 집이 야손의 집처럼, 그분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자리로 사용되게 되기를 항상 마음에 품고 사십시오. 소망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슴에 오늘 이 말씀이 콕 박혀서 절대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증인이고, 또 증인을 보호하는 변호인이자 보호자로 살아야 함을 늘 기억하면서, 그 일을 위해 기도하며 생각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 고백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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