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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2016년 5월 15일 주일 설교
2016-05-1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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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60515 성령 강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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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 1~33절,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515.mp3
(사도행전 강해 106)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보면, 참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소에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참 예수님 안 믿을 것 같다, 고집도 세고, 주관도 강해서, 힘든 일이나 어떤 심각한 계기가 아니면 주님을 영접하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겼던 사람이, 그저 의무적으로 지나치듯 전한 복음에 흔쾌히 반응을 하고, 교회에 왔다가, 결국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반대로 ‘전하기만 하면 꼭 믿을 것 같은 사람, 나와 깊은 신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그 성품과 태도가 온유하고 겸손하여, 충분히 주님을 영접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지만, 막상 복음을 전하면, 머뭇거리고, 이 핑계 저 핑계로 피하기만 하다가, 결국 긴 세월,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일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도하는 사람들은 그런 나의 선입견을 일단 내려놓는 데 적응하게 됩니다. 구원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대와 기도로 준비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전도 여행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울과 바나바의, 소위 1차 전도 여행의 결과 또한 그랬습니다. 처음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사역에 뛰어들 때만 하더라도, 사실 그들은 이방인들만을 위한 선교를 떠났다기보다, 일차적으로는,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이른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목적이 더 컸습니다. 그래서 어느 도시를 가나 유대인들의 회당부터 찾았고, 거기에서 발언권을 얻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은 늘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오래 믿어 온 유대인들은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방해하고 핍박했으며, 성령을 훼방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로 여겼던 수많은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예수를 믿은 수가 어느새 역전되었고, 얼마 안 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불가피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신앙이나 헤브라이즘이라 불리는 그들의 사유 방식에 아무 관계도 없이 살던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삶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예배드리는 것, 결혼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 등등 수많은 율법의 규례, 그 자체가 유대인들의 문화요 정체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율법을 그대로 지킨다는 건 결국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말이기에, 예수를 영접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한 게 아니었습니다. 할례가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모든 유대인 남성들은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그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자, 유대 공동체의 한 지체임을 확증합니다. 지금도 할례는 직접 랍비가 가위를 들고 영아에게 율법 그대로 행하고 있고, 어떤 예식보다 중요하고 성대하게,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기록하신 율법이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고 여깁니다. 실제로 이 당시에도 이방인이 유대교에 입교하려면, 그가 몇 살이든, 노인이든 아이이든 상관없이 할례를 받고 입교를 해야 했습니다. 할례는 율법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대문과 같은 역할을 한 겁니다.
유대인으로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 상당수는, 당연히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도, 먼저 할례를 받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민족적 자긍심으로만이 아니라,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의 율법이 그렇게 규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 같은 사람들은, 그런 과정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구약의 율법을 잘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했기 때문에, 이방인들 역시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본문 9절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의 필요 충분한 조건이 채워진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확신은 복음을 실제로 이방인들에게 전하면서 얻게 된 실제적 경험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변론과 첨예한 다툼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에는 이것이 별로 중요하지도, 또 어렵지도 않은 문제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늘날도 이 문제로 인하여 이단이 생기고, 또 교회와 교단의 분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제7일 안식교처럼). 그만큼 쉽지 않은,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사도행전 15장은 바로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때의 이 논의를 일컬어 ‘예루살렘 사도회의’ 혹은 ‘예루살렘 공의회’라 부릅니다. 앞으로 몇 주간 그 논의 과정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만, 그것은 길고도 힘겨운 논의의 여정이었습니다. 이제껏 경험해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문제였기에,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던 사도들에게조차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긴 본문의 결말이 증언하는 것처럼, 결국 초대교회 공동체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하고도 정확한 결론을 내리는 데 이르게 됩니다. 나중에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 결론은 결코 상식적이지도, 또 당시 다수가 처음부터 지지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도들이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고 수정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고 어려운 것은, 타협이 아닌 명확한 결론이 도출되어야 했고, 또 실제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긴 역사의 시간을 견뎌오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복음의 진리였다는 것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힘겨운 논의의 과정 속에서 중요한 돌파구를 열었던 한 대목을 오늘은 조금 깊이 나누려고 하는데요, 6절부터 9절을 잠깐 보시겠습니다. “6.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많은 사도와 장로들이 논의하고 변론하던 중, 그때 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합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오래 전에 하나님이 나, 베드로를 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우리 유대인들과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이 차별 없이 그들을 자녀로 인정해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이 말을 하면서 한 가지 사건을 염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사건, 하나님이 이 회의가 있기 전에 먼저 그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신 그 사건,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성도들도 함께 놀라고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던 바로 그 사건을 베드로도, 또 그 자리의 사람들도 함께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10장에 기록되었던, 고넬료라는 로마 백부장의 집에서 일어난 그 사건입니다.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면, 아마 여러분들도 그때 그 사건을 어느 정도 기억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두 사람, 한 번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두 사람을, 성령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간섭하셔서 기어이 만나게 하시던 과정들이 생각나실 겁니다. 또 베드로가 가진 기존의 생각과 신념과 신앙의 틀을 깨뜨리시는 성령 하나님의 지속적이고도 놀라운 일들도 기억하실 겁니다.
잠깐 그 대목의 결과를 좀 상기해보겠습니다. 10장 44절부터 48절입니다.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지금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한참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성령이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경험한 그대로,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들도 똑같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 높여 찬양했습니다. 이때 그 장면을 기록하는 누가는, 본문 45절에서 예리한 표현으로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라고, 당시 그 집에 찾아간 사람들의 정체성을, ‘할례 받은 신자’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47절에 베드로의 입으로 이렇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여기 물에 의한 세례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공적 인증이지요.
무슨 말입니까? 비록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이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그들은 이제 베드로와 무릇 할례 받은 모든 히브리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이 직접 인정하셨다는 것을, 베드로 스스로 입으로 이미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15장으로 돌아와서 베드로가 한 말을 보십시다.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절,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믿음으로,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들을 깨끗이 하셨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을 허무신 증거라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발언은 끝없는 논쟁과 변론의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베드로의 이 발언을 시작으로 논의의 초점이 율법에서 성령 하나님으로, 외적 표시에서 내적 변화로 전환되게 됩니다. 12절 말씀처럼 이에 온 무리가 가만히 침묵하게 되었고, 그 침묵 속에서, 이제 직접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의 살아 있는 간증이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증언됐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 이어 나가기로 하고, 지금은, 오늘이 마침 성령 강림 주일인데, 바로 이때 스스로 증언하시고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에 대해, 오늘 우리의 삶에 매순간 함께 하시며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는 임마누엘 성령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베드로의 경험과 발언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계획과 섭리 속에, 우리의 삶을 향해 참으로 섬세하게 임재하시고, 또 정확하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가, 그냥 멀리 하늘에서 우리를 늘 지켜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정도의 그런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내 몸을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고, 내 삶을 당신의 삶으로 바꾸시는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매순간 살뜰이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십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고아처럼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기쁨이나 왜곡된 즐거움에 취해 살도록 부름 받지도 않았습니다. 성령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경험하신 하나님나라의 의와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모든 예배와 기도와 묵상과 찬송과 섬김과 호흡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다 성령 안에서, in the Holy Spirit, 하나님 속에서 행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은, 결국 이 육체가 수명을 다하고, 썩어 먼지가 되는 그때에도, 우리를 그 죽음의 권세로부터 일으키셔서, 영원한 부활의 영광 가운데로 이끄시는 데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부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육체와 죽음과 죄에 매인 존재가 아님을 확증하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위해, 이제 그 어떤 다른 조건도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며, 다시는, 결코 다시는, 이전의 옛사람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실제적인 결과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아울러 성령은, 우리가 이 땅에서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시고 매순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주님은, 성령께서 친히 ‘모든 것’을 가르치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믿고, 내 의지로 순종하게 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역으로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우리는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고,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5)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떠나서, 성령 없이, 뭔가 조금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nothing,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그리고 결국은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 nothing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한 먼지 같은 삶을 살려고만 한다면, 그저 nothing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전부인 그런 삶을 살려 한다면, 성령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사람답게, 살고자 한다면, 이 땅에서 영생을 살고자 한다면, 그래도 뭔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something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성령 없이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성령을 늘 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지난 수요 기도 모임 때, 기도의 우선순위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 우리가 진짜 구해야 할 것, 그 우선순위가 뒤바뀌었기에, 우리의 기도에 열매가 늦어지고 없어진다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이번 주에도 또 한 번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일 먼저 성령을 구하라 하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충만히 구하라는 겁니다. 성령이 주시는 위로를 구하지 말고 성령 자체를, 성령이 가져오는 평안을 구하지 말고, 성령 자체를, 성령이 가져오는 기쁨을 구하지 말고, 성령 자체를 구하라 하십니다. 구하되, 더 간절히 구하라 하십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듯, 성령의 생수를 갈망하라 하십니다. 여러분 안에 그 갈망이 숨 쉬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한가, 아니면 성령을 소멸해가는가, 그 여부를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내가 성령을 사모하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참 이상하게도 마치 성령이 부족하기나 한 것처럼 성령을 구하고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을 소멸해가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영혼의 특징은, 성령을 더 이상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나 자신이,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완전히 눌러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자, 오늘 본문 10절은 그를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라 부릅니다. 다른 성경은 이를, ‘스스로 하나님보다 더한 하나님이 되는 삶’이라 번역했습니다. 내가 내 삶의 하나님이 되는 것, 스스로 홀로 서며, 홀로 자족하는 사람, 혹시 지금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한 삶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의 삶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은 단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성경은 무어라 합니까? 어제 QT 본문 말씀처럼, 사탄은 어딘가로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해 가며, 귀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쉼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성령이 근심하시는 상황 가운데 처한 교회와 성도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어떤 능력도, 어떤 열매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사야 63장 10절 말씀처럼,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친히)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가 시작되는 겁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성령의 이 거룩한 돌격이 임하기 전에, 부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삶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성령을 구하고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처음 성도들에게 임하시던 오순절의 모습을 기록한 사도행전 첫 두 장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는, 성령 하나님은, 성령이 오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다림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지요. 그분이 우리의 무딘 마음을 녹이시고, 이미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실 때까지, 잠잠히 신뢰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사 30:15). 우리가 멈추지 못하는 수많은 잡다한 일들과 가치 있어 보이기만 할 뿐, 즐거워 보일 뿐,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닌 nothing의 그 일들을 멈추고, 성령을 기다리며 간구할 때에, 비로소 내가 성령 안에, 성령이 내 안에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결코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을 너무나 소홀히 여겨왔고, 늘 내가 성령 안에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았기 때문에, 낯설고 어려워 보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책 ‘거룩한 순종’에서 토마스 켈리가 말하듯, 우리는 주님의 사랑 밖에 있었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 사랑의 물결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을 뿐, 성령은 언제든 우리가 주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우리로 당신의 그 물결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이 증언하듯, 성령의 초청에 우리 자신이 응답하지 않는 한, 성령은 결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이 인격이시며, 우리를 인격으로 대우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는다.”(요한계시록 3:20) 말씀하십니다. 문을 열어야 하는 마지막 결단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몫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긴 본문의 후반부에는, 놀라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이 말씀에서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까? 바로 이 문장의 주어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이 주어, 이 주어가, 오늘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긴 변론과 모든 논쟁의 결론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주어가 ‘성령과 우리’, ‘성령과 나’, 이렇게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근심이 성령의 충만한 능력으로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그 성령은 이미 우리에게 오셨고, 우리 안에 계시며, 지금 우리를 이곳에 함께 있게 하셔서, 이 말씀을 통해 증언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령의 물결 안에서, 성령을 누리며, 맛보며, 그분의 물결이 이끄시는 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주의 나라로 회복되어져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