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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2016년 5월 1일 주일 설교

2016-05-0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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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01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4장 8~28절,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501.mp3 (사도행전 강해 104)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나면서부터 하반신 장애를 가진 사람을 치유하던 일, 그리고 신으로 추앙받다가 급기야는 제사까지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겨우 제지하던 일, 그러면서 그런 헛된 일을 그치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선포하던 일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눴습니다. 두 사람을 신으로까지 추앙했지만, 지지난주 말씀에서 강조한 것처럼,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두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다시 둘로 명확하게 갈라집니다. 본문 20절에 ‘제자’로 표현된 사람들과 19절에 바울을 돌로 치기까지 핍박한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이지요. 사실 여기 19절과 20절은 너무나 이해하기 힘든(mysterious) 말씀입니다. 방금 전까지 신이라 부르며 환호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죽을 만큼 린치를 가할 수 있을까,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여기 돌로 사람을 치는 건 그냥 어느 정도 상해를 입혀 협박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당시 돌로 치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익숙한 사형 방식이었습니다. 돌로 친다는 것은, 그를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극단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처럼, 사람은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그저 소리만 지르고, 실제로는 로마의 힘을 빌려 공식적으로 처형하는 것과 자신의 손에 돌을 들고 직접 사람을 향해 그 돌을 던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19절을 다시 보시면, 그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충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대로, 안디옥에서 귀족들을 선동하여 두 사도를 박해하고 쫓아내었던 사람들, 그리고 이고니온에서 복음으로 둘로 나뉜 사람들 중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던 사람들이 아마 이들일 것입니다.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의 거리는 30km가 조금 넘습니다.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여기 루스드라까지는 자그마치 160km 거리입니다. 그 긴 거리를 달려온 단 하나의 이유, 그것은 예수를 메시아요,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바울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이미 바울과 바나바를 경외하고 있던 루스드라의 사람들을 기어이 충동하고 설득하여 그 일을 실행해 옮기고야 맙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돌로 치는 행위는 성 밖에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신명기 17장). 먼저 성 밖으로 끌어내어, 거기서 형을 집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루스드라 성 안에서 바울을 돌로 쳤고, 그가 죽었다고 판단했을 때,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어 내버렸습니다. 그를 잡아 성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 일이 단지 유대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충동을 받은 루스드라의 이방인들 역시 참여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도대체 어떤 설득이 있었기에, 루스드라 사람들은 그렇게나 쉽게 태도를 바꾸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소에는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성 안에서 그런 일이 있도록 허락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의 경외감과 환호를 일순간에 살기(殺氣)로 변하게 했을까? 도대체 그 유대인들은 무슨 말로 그들을 설득한 것일까? 무엇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그 먼 길을 달려오게 했을까? 성경은 이에 대해 아무런 추가적인 설명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혹시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하고 궁금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나, 당시 성도들에게는, 그 일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는 아닐까요? 여러분 그 뻔한 이유라는 게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3장 44절, 45절입니다.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고자 한 이유를 성경은 시기심이라 말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상황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에는 강렬한 시기심이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비방하고 모욕하는 것을 넘어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죽일 이유를 찾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교 제사장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역시, 이 시기심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그 말씀 앞에 변화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의 위협을 느꼈고, 곧장 강력한 시기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처음엔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같은 시기심을 느꼈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그 제자들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이 직접 주님의 메시아 되심을 선언하기 전까지, 깊은 시기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시기심은 살아있는 자에게서 자라다 그가 죽을 때 멈춘다.”는 말처럼(에머슨), 시기심은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성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살면서 늘 경험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서경은 우리의 그 시기심이,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지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당연한 성정이, 우리의 보편적인 그 감정이, 사람을 죽이고, 또 그 일에 누군가를 충동하기도 한다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의 충동을 받은 루스드라 사람들, 그들에겐 아마 이 시기심과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추앙했던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또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비록 오늘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사도행전의 다른 본문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던 때의 일이 나옵니다. 그때도 바울을 모함하고 군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는데요, 그의 이름이 데메드리오였습니다. 에베소에는 풍요와 다산의 여신 아데미(제우스의 딸, 올림포스 12신 중 하나로 모든 여신들의 어머니 신)를 숭배하는 신앙이 팽배했고, 유명한 아데미 신전이 있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당시 에베소에 있던 이 아데미 신전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아데미 여신상을 은으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일로 데메드리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벌이를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자 그 일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모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바울이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데메드리오가 이렇게 사람들을 충동하며 소동을 벌입니다. “(이제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19:27) 이 말에 사람들은 분노가 가득해졌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들이 누리던 이익과 벌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급격하게 폭력적으로 변했고, 철저하게 바울의 적이 된 것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루스드라에는 제우스의 신전이 있습니다. 당연히 신전을 섬기는 많은 제사장들과 무당들이 있었고, 그 신전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 한 유대인들은 분명 그들에게 같은 접근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내버려두면, 결국 당신들의 신과 신전이 천하게 될 것이요, 더불어 모든 이익과 돈벌이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을 것입니다. 돈은 그런 문제입니다. 돈, 물질 그 자체가 하나의 신이요,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자체로 가장 하나님과 대등한 신이기에, 그 문제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성정이 그렇습니다. 내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장애인 보호 시설이 내 집 근처에 들어와서는 안 되고, 내 이익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판매한 제품으로 인해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것, 진리와 양심, 종교와 도덕, 그 모든 게 한갓 먼지와 같이 흩어지게 하는 그 물욕이, 우리 인간이 가진 ‘같은 성정’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해야 할 어려운 문제는, 왜 바울 혼자만 그 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20절에 보면, 돌에 맞아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바울 옆에 제자들이 둘러서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기적적으로 일어나자, 바울과 함께 다시 루스드라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돌에 맞고 있던 그 순간에,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더 심각한 질문은, 바로 바나바에 대해서입니다. 분명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바나바 역시도 돌로 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전령에 불과한 헤르메스요, 바나바는 자신들이 최고의 신으로 모시는 제우스라 했으니, 당연히 우두머리인 바나바를 내버려 두려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처형의 현장에 바울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죽다 살아난 바울이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바나바의 모습이 다시 등장하고, 바울과 함께 더베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되어 있을 뿐입니다. 물론 바나바와 다른 제자들이 바울을 배신했다고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여라도 살기(殺氣)로 가득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닐 때 두려움에 휩싸여 어딘가로 숨었다고 해도,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두려움과 연약함의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핍박을 당하기는커녕 복음을 위해 감내해야 하는 작은 삶의 불편조차도 외면하는 게 우리의 성정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의 위협, 상해의 위협, 손해의 위협이 있는 자리에서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우리의 성정과 맞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주님의 제자들도 처음엔 그 같은 성정 앞에 한없이 연역한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을 섬기고 치료하는 일에 바친, 최흥종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구한 말 자신의 땅을 기증해서,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 ‘광주 나병원’을 설립한 분입니다. 3‧1운동 당시 옥고를 치르고, 숱한 고초 끝에 조선 총독부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아내기도 했던, 저희 장신의 자랑스러운 선배 목사님이시기도 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때가 그의 나이 25세 때, 1904년이었습니다. 당시 잘나가는 순검(巡檢)이 됐지만, 결국 그 일을 그만두었고 광주제중병원에서 미국인 선교사 포사이드를 도와 나환자 치료에 처음 몸을 담게 됩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일평생 그 일에 헌신할 정도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결정적인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되는 사건이 생깁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님이 그를 향해, 땅에 떨어진 한 한센병 환자의 지팡이를 집어서 자신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듣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청년 최흥종은 도저히 그 냄새나고 진물이 흐르는 지팡이를 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전에 ‘텟짱’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한센병을 앓고 있던 저자의 모습과 그 사진을 보게 됐습니다만, 한센병은 나병균에 의해 얼굴과 몸의 피부와 근육이 문드러지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현재도 그 정확한 전파 방법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지속적이고 긴밀한 접촉에 의해서 균이 옮겨진다고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함께 하는 정도로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00여 년 전 조선 땅에 살던 한 크리스천 청년은 그 환자의 지팡이를 집어 올리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면서, 큰 충격에 빠지고 맙니다. “미스터 최, 어서 지팡이를 집어주세요. 어서요.”라고 말하는 포사이드 선교사, 이 외국인 선교사는 심지어 환자들의 상처를 만지고 돌보며 자기 자식처럼 아끼며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더 건강하고 젊은 조선 청년인, 자신은 도저히 그 지팡이조차 만질 수 없다는 말인가, 그 현실 앞에서, 청년 최흥종은 깊은 좌절과 충격을 맛봅니다. 그리고 긴 고민과 갈등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한 진정한 회심을 경험합니다. ‘믿는다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니구나. 내 힘으로는 흉내는 내어도, 살아낼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인간의 성정은 절대로 말씀을 지켜낼 수가 없구나.’ 깨닫습니다. 같은 성정을 가진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성정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에 대해 눈을 뜨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이 속한 지역을 갈라디아 합니다. 이 지역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세운 교회의 성도들에게 훗날 쓴 편지가 바로 잘 아시는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은 그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이 성정으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 말씀을 최홍종 목사님은 평생 삶의 푯대로 삼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백처럼,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같은 이기심을 가지고 있고, 같은 시기심을 가지며, 같은 두려움과 같은 연약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다른 성정을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했고, 그리스도의 인격이 살아 숨을 쉬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한없이 담대하고 자유했습니다. 무엇보다 육체의 성정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 성령이 원하는 바를 행하려고 애썼습니다. 돌에 맞아 처참하게 부서진 몸을 이끌고, 다시 100km나 떨어진 더베로 복음을 들고 전진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제자들을 향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새번역)고 권면합니다. 같은 성정이지만, 다른 삶을 살던 바울, 과연 우리는 오늘, 어떤 성정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바울이 고백하듯,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도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자신 안에 있는 두 가지 성정의 싸움에 시달렸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두 가지의 성정이 있어 날마다 싸우고 있다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울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성정으로 사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비록 그 안에 깊은 고뇌와 싸움이 늘 현존했지만, 그는 기어이 그리스도의 성정이 육체의 성정을 이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고백한 대로, 그가 성령을 따라 살고자 몸부림쳤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장 존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부으신 성령 때문입니다. 우리가 숨이 멎으면 한갓 더러운 먼지로 부패해버리는 이 육체를 가지고서도, 감히 하나님의 형상이라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받으라, 충만하라 하신 그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만 아는 이기심과 남 잘 되는 것을 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자유하고, 나병 환자의 지팡이를 집을 수 있으며, 죽음에 이르는 고난 앞에서도 복음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단 1분 1초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손 놓고 있다고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나의 무능과 한계를 인정하고 성령을 사모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성령을 하나님께 날마다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것 구하지 말고, 성령을 구하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가장 급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날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신자에게 생명은 기도라고 말했습니다(우찌무라 간조). 우리의 신앙은, 잠깐의 흥분이나 종교적인 열심으로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루스드라 사람들처럼, 기적을 내 두 눈으로 본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흥분은 잠깐이며, 기적은 불씨일 뿐 저절로 화염이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연단의 과정을 매일 거쳐야 하고, 복잡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바울이 22절에서 권면하는 것처럼,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보는 것처럼,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같은 성정이라도 누군가는 다른 이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가 있고, 또 누군가는 이익과 시기심 앞에 믿음과 양심을 파는 자도 있으며, 또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돌로 치는 자리에 직접 서 있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성정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의 루스드라 현장에 있는, 같은 성정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습니까? 진정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성정이 나타나지 않는 그것이, 우리에겐 큰 아픔과 충격이 되고 있습니까? 이런 일이 왜 나의 삶에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지, 여러분 고민하고 있습니까? 주중에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환자와 상담한 이야기 한 가지를 라디오 방송에서 들려주는데, 제겐 참 신선한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이 혹시 치매가 아닌가 해서 상담하러 오는 분들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스스로 걱정하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치매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치매는, 나는 괜찮다고, 나는 절대로 치매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적 치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성령의 성정으로 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왜 나는 여전히 육체의 성정을 이기지 못하는가, 염려하며, 거룩한 근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소망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의 성령으로 가득한 진짜 그리스도인에 눈을 뜨십시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성정이 육체의 성정을 이기는 삶을 사십시다. 아주 잘 살고, 부유하지는 못해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과 성도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사십니다. 지금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누군가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자리에 서기로, 이 시간 다시 한 번 결단하십시다. 같은 성정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반드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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