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변의 바탕이 된 설교

'기쁨과 성령' 2016년 4월 10일 주일 설교

2016-04-10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0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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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0 부활절 세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3장 44~52절, 기쁨과 성령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410.mp3 ‘기쁨과 성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기쁘십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에게 수도 없이 했던 질문이, ‘그럼 너는 기쁘냐?’였습니다. 아마 수백 번 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또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반복하여 자문하면서, 아는 목사님 한 분이 했던 얘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가족이 새로 교회에 등록을 해서, 새가족 심방을 위해 목사님이 그 가정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시간 내내 지루해하고 힘들어하던 남편 되시는 분,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앉아만 있는 분에게,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혹시 제게 궁금한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 보십시오.” 그랬더니 잠깐 생각하고는 그 새가족이 그렇게 질문을 했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보면서, 그 인생이 참 무료해 보였던지, 그걸 묻는 새가족 앞에서, ‘과연 내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한 지체가 제게, 제 얼굴이 시무룩해 보인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딱히 시무룩하지 않은데, 왜 그렇게 보였을까…. 내 안에 정말 기쁨이 없는 걸까, 여러 고민을 했고, 그 고민 속에서 제 얼굴은 더 시무룩해져 갔습니다. 사실 그 사람이 ‘지금’ 기쁘냐,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그가 ‘언제’ 기쁘냐, 그가 ‘무엇으로 인해’ 기쁘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기쁨을 원하고, 추구하며 살기 때문에, 이 분별은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기쁘고, 언제 행복합니까? 내가 언제 기쁜지, 평소에 별로 기쁜 일이 없어 잘 모르겠다면, 역으로 내가 어떤 근심을 하고 있는지, 무엇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돈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은 돈으로 인해 기쁨을 얻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의 관계 속에서 고민한다면, 마찬가지로 그는 거기서 주된 기쁨을 얻습니다. 근심과 기쁨은 한 나무에서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의 특징,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고 사는 사람의 특징은, 죄에 대한 근심과 슬픔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땐 지금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주님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이 커지면 커질수록, 죄에 대한 슬픔도 커진다는 점에서, 성도에게 애통은 기쁨의 반대말이 아니라 기쁨의 그림자라 하는 게 더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통한 기쁨이라는 실체의 크기만큼, 애통함의 그림자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애통은 잠깐의 과정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성도는,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벧전 1:6) 죄인의 괴수임을 자각하고 아파하는 그 애통의 자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뒤덮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죄의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장 자주 범하는 죄가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치명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다른 기쁨의 근원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13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를 파느라 우리의 삶이 참 고단합니다. 그리고 막상 물이 잠시 모여 기뻐하다가도, 금방 그 기쁨이 사라지는 걸 보며 오히려 크게 실망합니다. 잠깐 근심하게 되어도, 그로 인해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성도(벧전 1:6)의 삶과 정반대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 52절은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해졌다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비디시아 안디옥에서 있었던 많은 사연과 이야기의 결론, 그것은 “기쁨과 성령으로 제자들의 삶이 넘쳤다.”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삶, 그 결론도 기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 기쁨의 이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결국 그 지역에서 추방되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많은 박해와 억압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기쁨입니다. 그것도 흘러넘치는 기쁨, 여기는 ‘충만하다’는 동사 ‘플레오로’는 미완료형입니다. 완료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잠깐의 쾌락으로 흥분된 상태가 아니라, 충만하고 지속적인 행복감을 의미합니다. 결론이 그것입니다. 마지막이, 기쁨이요,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짐입니다. 여기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병렬적인 것으로, 기쁨과 성령, 이렇게 이해하기보다는, 성령 안에 있는 기쁨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입니다. 로마서 14:17의 말씀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온전한 기쁨이 존재하고, 성령이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 가시는 열매가 바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기쁨은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할 것은 기쁨이 아니라 성령이어야 합니다. 이 우선순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기쁨이 왜 내 안에 없지,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 그러면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아 헤매보면 알게 됩니다. 그럴수록 기쁨은 더 멀리 사라지고, 남아 있던 기쁨마저 소멸되어 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기쁨이 아니라 성령을 ‘먼저’ 구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쁨의 길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여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특징은 범사에, 즉 모든 일에 있어서의 감사와 기쁨입니다. 이유 없이 기쁜 게 아니라, 모든 게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성령에 취한 사람과 약에 취한 사람은 한끝 차이입니다. 약에 취하면 이유 없이 기쁘지만, 성령에 취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삶 순간순간이 기쁨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모든 시공간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현존이 있음을 느낍니다. 즐거움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며 즐거워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실 때, 기쁘셨겠습니까, 아니면 슬프고 고통스러우셨겠습니까? 물론 슬픔과 고통의 순간도 있었지만, 거의 매순간 기뻐하셨습니다. 이건 제 판단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도 곳곳에 주님이 ‘나의 기쁨’(‘카라 에메,’ 헬라어로 ‘기쁨’이 ‘카라’인데요)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이 고통의 근원이라 여기며 사시지 않고, 매순간 범사에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벗어나고 피해야 할 것이 세상이 아니라, 누리며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아직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사람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공동, 요한복음 17:13)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도 주님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15:11) 주님의 마음은 기쁨으로 채워져 있고, 또 그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며,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온전한 기쁨 속에 우리를 던져 넣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 52절을 다시 보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의 주어가 ‘제자들’입니다. 이 제자가 정확히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안디옥에서 쫓겨나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일 수도 있지만, 문맥상 안디옥에서 새롭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막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향해, 성경은 ‘제자’(마데테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건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을 삶으로 뒤쫓아 가는 사람들, 주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 그것이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며, 뒤따르는 이들이, 우리가 아는 제자입니다. 그런데 안디옥의 성도들을 성경은 주의 제자라 부릅니다. 그러고 보면, 그 앞의 44절부터 49절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정말 두드러집니다. 44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고 나오고, 46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전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47절에도 ‘주께서 우리에게 명하셨다’고 해서 주님의 말씀이 동사의 형태로 등장하고, 48절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이 찬송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다, 꼭 기억해 두실 표현입니다.) 49절에도 ‘주의 말씀이 두루 퍼졌다’ 선언하고 있음을 봅니다. 계속해서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맺고 있는 깊은 관계를 본문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45절입니다. 45절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45절은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지 않고 다르게 부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반박하고 비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지 못하고 그냥 사람의 소리라 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기쁨이 아닌 시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대적하는 일이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다. 이 둘의 차이가 분명해지십니까?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의 편에 설 때, 내가 제자의 길을 선택할 때 맺어지는 열매인 겁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늘 즐거움을 추구하고 살라는 말, 항상 기쁨을 쫓아가며 살라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을 다르게 옮기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라, 매순간 주의 제자로 살아라, 하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한다, 하신 말씀 바로 앞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 15:10-11) 주님이 누린 기쁨은, 어떤 특별하고 새로운 기쁨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아버지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이 낳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기쁨,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주시는 그 완전한 기쁨을 세상의 다른 기쁨으로 대신하려 하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 사도가 사랑에 관해 말한 것처럼,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길을 선택하십시오. 우리가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기쁘지 않은 그 상태를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이고, 그 다음으로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기쁨 없는 삶에 만족하고, 별로 기쁘지도 않은 것으로 진정한 기쁨을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터진 웅덩이를 열심히 파고, 거기에 열심히 물을 채워 넣는 그 분주함으로 여러분의 삶을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쁨 없는 삶에서 말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믿은 세월이 얼마냐가 그의 제자 됨을 정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가, 그의 기쁨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된 사랑과 순종과 잇대어 자라고 있는가, 그것이 진정한 기준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향해 계속 질문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기쁜가? 무엇으로 기쁜가?’ 그리고 기쁨이 없을 때, ‘내가 너무 멀리 왔구나’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앉아,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주님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 안에 있던 그 기쁨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해져서, 우리의 삶, 한 절, 한 절을 그 기쁨으로 반드시 물들여 주실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 무슨 재미로 삽니까, 누군가 우리에게 질문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의 이유가 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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