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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3)' 2016년 2월 28일 주일 설교

2016-02-2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2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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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8 사순절 세 번째 주일 --------------------------------------------- 사무엘하 12장 1~15a절, 시편 51편 1~19절 [부활의 현실 살기 #97]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3)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60228.mp3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주중에 누구를 좀 기다리는 빈 시간이 우연히 생겨서, 영화 ‘동주’를 봤습니다. ‘귀향’을 볼 마음의 힘까지는 없어서, 대신 ‘동주’를 봤는데, 보는 내내 염치없는 목사의 삶을 또 한 번 뒤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냥 신나는 걸 볼 걸,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영화 후반부에, 동주와 그의 사촌 몽규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며 죽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죽기 얼마 전 일제는, 그들이 합법적으로 수감되어 죽음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일종의 자백서를 만들어 강제로 서명하게 만듭니다. 물론 그 문서에는 동주와 몽규가 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지 않았던 죄들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영화는, 그 자백서를 앞에 둔 두 사람의 반응을 대비적으로 번갈아가며 보여주며, 그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동주보다 훨씬 독립운동에 열심이었던 몽규는 눈물을 흘리며 그 문서에 서명을 합니다. 그 거짓 진술서에 기록된 내용처럼 제대로 독립을 위해 일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워 그는 울부짖습니다. 일본이 만든 그 거짓 진술서가 다름 아닌 자신이 살아내지 못한 삶이요, 목표임을 부끄러워하며, 그는 진술서에 서명을 합니다. 진술서 앞에서 몽규와 같은 눈물을 흘리지만, 동주는 차마 서명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 않습니다. 동주도 그 문서의 내용처럼 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평생 시를 사랑하고 시를 꿈꾸던 자신의 모습, 어찌 보면 뭐라 죄라 할 것도 없는 그 평범하고 아름다운 삶에 대하여, 동주는, ‘이 시대에 태어나 편안히 공부하고 시를 쓰려 한 나 자신이 부끄럽다’ 오열하며, 서명을 거부합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해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두 사람의 모습 앞에서, 저는 비로소 제대로 된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느낍니다. 그들보다 훨씬 좋은 세상에서, 훨씬 더 형편없이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런 부끄러움조차도 느끼지 못하는구나, 양심과 신앙은 돌처럼 굳고, 문둥병 걸린 환자처럼 감각을 잃어, 아예 염치를 모르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게 하는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어린 시절 동주와 몽규처럼 살았을 다윗이, 그의 노년에 무너지고 추락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이 이어지다 기어이 거리의 불량배도 하지 않는 일까지 행하며, 아름다웠던 그의 삶은 죄로 얼룩집니다.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그리고도 양심의 아무런 요동도 없는, 오늘 다윗의 모습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십니까? 다윗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정말 다윗이 미쳤나보다, 나는 저렇게까지 악하지는 않아, 다윗도 그 정도인데 나도 괜찮은 거구나, 차라리 다행이다,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다윗이 고백하는 시편51편 같은 회개가 자연스레 흘러나오게 됩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며, 거의 완전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던 이들에게, 진정한 살인과 간음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이며, 그는 반드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인격과 신앙이라 칭찬받던 이들을 향해, 주님은 잘 꾸며놓은 무덤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처럼 교만하거나 위선적이지 않다고, 나는 적어도 내가 죄인인 것은 알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율법에 기록된 단 하나의 점, 단 하나의 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너희들의 의로움이 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않으면, 너희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진퇴양난에 처한 우리에게, 주님은 새 율법, 새 계명을 말씀해 주시면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분 마음에는 어떤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제대로 된 독립운동의 모습이 기록된 진술서 앞에서 통곡하던 두 젊은이의 부끄러움이 느껴지십니까?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분하고, 안타깝고, 억울하게 여겨지십니까, 아니면 ‘이건 뭐지? 도대체 이걸 왜 우리한테…’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처음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 뒤따르던 제자들은 어떤 반응이었을 것 같습니까? (*) 성경은 당시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듣고 난 후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놀라움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권세 있는 사람, 심판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온전히 선포하는 존재처럼, 단호하고 분명한 영적인 권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말씀을 하시면서, 주님이 사람들에게 기대하신 반응이, 과연 놀라움, 그것뿐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모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던 세례 요한이 했던 그 말을 똑같이 반복하시며 사람들에게로 나아오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에 왔다.” 그것은 요한의 말이기도 했고, 주님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기 위해, 다시 말해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부끄러워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놀라고 신기해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지금 가고 있는 길, 지금 살고 있는 삶을 멈추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에 권세가 있네, 뭔가 다르구만, 정말 말씀이 좋아, 힘이 있어, 감동이 되네, 정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말씀이네…. 아, 정말 충격적인데, 놀라운 말씀이야, 어떻게 저런 이야기를, 참 신기하다…. 이런 구경꾼들의 감정적인 반응들은, 적어도 주님이 기대하신 반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기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일마다 설교를 통해 말씀을 나눌 때도 주님은 같은 마음이십니다. ‘와, 놀랍다’ ‘와, 신기하다’ ‘와, 대단하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뎌진 양심의 굳은살을 제거하고,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달려가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그 말씀이 오늘도 우리에게 선포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회개를 잊고 그저 놀라는 반응이 계속되면, 그 놀람은 무뎌지고 왜곡되어, 결국 예수에 대한 배신과 외면으로 이어짐을,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보게 됩니다. 놀라기는 하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손이 결국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그가 하신 말씀 앞에서, 솟구쳐 오르는 울분과 한탄을 느껴야 합니다. 형사가 내민 진술서 앞에서,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고 살 길을 찾는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지 못한 삶을 부끄러워하던 몽규와 동주의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들은, 예수님만 살아내신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만드시고 구원하시며 하나님이 품으셨던 기대 속 그 모습, 하나님의 아들, 딸들의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애통함이 없다면 그것을 마음을 하나님께 구하십시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그 부끄러움과 원통함을 달라고, 그 상한 심령을 우리에게도 회복시켜 달라고 오늘 우리가 함께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힘들어도 말씀하신 그 삶을 살아가려고 애써보십시다. 부끄러움은 삶의 방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주와 몽규가 부끄러워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지만 그들이 그 방향으로, 그 길을 쉼 없이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길 밖 멀찍이서 바라보면 놀라움만 생깁니다. 그 길 위에 서야 죄에 대한 애통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힘으로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우리가 죄 중에 출생하여 항상 죄를 앞세우고 사는 삶인 것을 주님은 아십니다. 이미 지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점점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져 가는 것도, 선을 행할 의지와 힘이 없는 것도 모두 아십니다. 그래서 그 죄의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이 모든 책임을 치르셨습니다. 친히 우리가 지은 죄의 옷을 입으시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당신이 입고 계신 의로운 옷, 하나님의 아들, 딸의 옷을 입혀주셨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다윗이 51편 10절, 11절에서 간구한 그 일을,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시고 행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을 향해 돌이켜 달려갈 수 있도록,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있도록, 이 시간에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오늘 다윗의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뭐가 대단하다고, 뭘 잘했다고, 죄를 지은 주제에 이런 회개의 시편이나 기록하고 있었나,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제가 그런 마음이 들었었습니다. 사실 묵상하는 내내 계속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참회하며 조용히 살 일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런 시를 쓴다,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고백이 다름 아닌 회개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회개가 시작합니다. 이 고백을 통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함을 얻고,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범하고, 죄악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 앞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왜 내가 그랬을까, 왜 이렇게 나는 못났을까, 수치스러움에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돌아서 향할 다른 길이 있는가, 하는 데서 둘의 부끄러움은 전혀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죄는 그냥 잘못된 행위이며, 그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죄가 나와 죄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죄와 하나님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는 곧 관계의 깨어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형벌을 모두 받으셨어도, 여전히 우리는 다시 반복하는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반드시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용서하셨으니, 다 해결하셨으니, 만사 OK,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거기 나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업신여깁니다. 사람에게 행하는 죄이든, 나 홀로 행하는 것이든, 마음으로만 짓는 죄이든, 그 본질은 모두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비유로 이야기한 후 전했던 하나님의 메시지의 핵심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하여 다윗에게 전달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하나님은 밧세바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것을 먼저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 다윗과 하나님이 바른 관계 속에 있었던 것부터, 그리고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김으로 그것이 깨어진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모든 범죄가 사람을 향하여 발동되기 전, 다윗이 하나님 눈앞에서 악을 행하던 것으로부터 말씀하십니다. 죄는 모두 그렇게 시작됩니다. 태양 같은 눈동자로, 달과 같은 은은함으로, 매순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은 채,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으로 그의 인격을 모독하듯,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외면하고 얼굴을 돌려 그분의 인격을 짓밟으면서 죄는 시작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아에게, 밧세바에게 지은 그 죄를 하나님께 먼저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란 잊어버린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자리로 내려가는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를 슬퍼하되,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죄를 부끄러워하고, 더 온전하게 살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다시 하나님으로 살아가시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죄를 이길 힘을 얻습니다. 빛 가까이로 가야 허물이 보이고 문제가 드러나듯,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사귀어 살아야 더 선명하게 우리의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그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 이길 힘을 주시고, 죄와 맞설 용기를 주십니다. 죄를 슬퍼하고 후회로 밤을 지새운다고 해도 죄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 슬픔과 무기력에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야만, 우리는 온전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시를 쓰며 무기력하게 사는 삶이 부끄럽다 고백하는 동주에게, 시인 정지용 선생이 이렇게 위로합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진정 부끄러운 거라고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가 부끄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입니다.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리우기 위해, 우리의 염치없음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늘도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의로움으로 우리의 수치를 가린 채 용기를 내어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벌거벗은 부끄러움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입혀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머물러 있을 존재가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야 할, 존귀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영을 구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힘을 내어 마저 걸어가십시다. 죄의 열매가 아닌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오늘도 참된 회개의 씨앗을 심어가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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