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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2015년 성탄절 설교

2015-12-2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1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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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5 성탄절 --------------------------------------------- 누가복음 2장 1~20절,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 설교 음성파일 : 음성이 없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성탄절이 연말에 있어서 우리는 이때마다 한 해 우리가 살아낸 세월과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고, 주를 위해 헌신한다고 했지만, 결과는 올해도 낙제 수준이구나, 싶습니다. 저희 모두는 2015년 한 해, ‘올해의 죄인’이 되려고 열심히 각축을 벌이며, 수많은 전과를 쌓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탄절의 기쁨이 확 사라지는 느낌이시겠지만, 그것이 우리의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어릴 적 새벽송을 돌며 외치던 소리이고, 또 앞서 평화의 인사에서도 나눈 구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참 좋은 말씀이지만, 사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없이는 그저 모순, 말도 안 되는 소리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23절)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에게 평화는 없습니다. 죄가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죄는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듭니다. 하나님 근처에도 못갑니다. 단언하건대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에게로 오셔야만 했고, 오늘 성탄절이 달력에 새겨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 모일 수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구원의 길이 뻗어 나온 것, 우리가 갈 수 없어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모인 이유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말씀처럼, 강보로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보십시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하나도 특별하지 않고, 조금도 하나님 같지 않은 여느 아기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불교의 경전 《전등록(傳燈錄)》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적습니다. 태어난 아기를, “인드라와 브라흐마라는 신이 씻어 주었으며” “석가모니불은 태어나자마자 한 손은 하늘을, 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하다고 말하였다(天上天下唯我獨尊),” 비르질 게오르규가 지은 『마호메트 평전』에는 이슬람의 마호메트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엄마의 태내에서 나오자마자 손에 흙을 쥐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는 몸에 할례(割禮)를 받은 채로 태어났고, 배꼽의 탯줄도 끊어져 있었으므로 산파의 손은 필요조차 없었다. 많은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갓난애의 몸을 씻겨 주었다. 여인들이 더운물로 목욕을 시키려고 했을 때에 마호메트는 이미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예수는 좀 다른 모습입니다. 평범한 여느 아기와 다를 바 없는 모습, 저와 여러분이 태어나던 그 모습, 하음이와 하준이처럼, 그렇게 연약한 핏덩이로 오셨습니다. 본문은 이 아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로 왔느냐, 얼마나 신성하고 초인처럼 왔느냐, 거기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어디까지 연약해져 이곳에 왔느냐,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연약한 아기 예수에 대해 성경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 합니다. 본문 7절에도 나오고, 12절과 16절에도 계속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12절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표적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이다.”로 옮깁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이 아닌 아기의 무능이 메시아를 알아보는 표식이라 말씀합니다. 여기 강보는, 아기를 싸는 포대기와 같으면서도 다른 면이 있습니다. 또 우리 배냇저고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요, 여기 한 번 보시면, 이스라엘의 강보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 옷이 아니라, 길고 얇은 하얀 천인데요, 그 위에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당시 예비 엄마들은 태교를 하면서 이 강보에 아기 이름 혹은 아기를 축복하는 글을 직접 수놓았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예수라는 이름, 그리고 요즘 우리가 함께 QT로 묵상하고 있는 이사야서의 말씀들을 적어놓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사진 속 이 강보는 한 레위 지파 출신의 아기의 것으로, 그 길이가 285cm, 끝에 달린 107cm 끈을 합하면, 전체 길이가 약 4m에 이릅니다. 이렇게 긴 강보로 갓난아기를 감싸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포대기라기보다는 붕대와 같을 겁니다. 실제로 이 강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탈’은 붕대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강보에 싸인 예수님을 그린 15세기의 그림, ‘성전에 드려지는 아기 예수’라는 이 그림을 보시면, 그 모습이 분명해 지실 겁니다. 강보는 일종의 옷이지만, 보통의 옷보다 훨씬 더 아기의 연약함을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외부 환경, 추위, 세균, 심지어는 영적인 위해까지, 여러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는 붕대가 바로 강보인 겁니다. 예수님은 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서 아무 것도 그를 공격할 수 없는 무적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 강보가 표적이 되는 그런 존재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디든 걸어가고 말도 하는 수퍼맨으로가 아니라, 강보 없이는 생명을 지킬 수도 없고, 부모의 손길 없인 서 있을 수도 없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기 예수의 표적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라면, 좀 넉넉한 부모이면 좋았을 텐데,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도 참 가난하고 미약했습니다.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했지만, 가난한 목수 아버지는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마리아의 출산을 위해, 제대로 된 숙소 하나도 준비하지 못합니다. 어머니 마리아 역시 자신을 늘 ‘비천한 여인’이라 노래했습니다. 15세기의 이 그림처럼, 누가복음 2장 후반부에 보면, 정결예식을 위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리아와 요셉이 가져 간 제물은 양이 아니라, 형편이 안 되는 가정이 선택하던 비둘기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삶 자체가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미약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라면 조금 더 따뜻하고 보다 위생적인 곳에 뉘여야 했지만, 예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 가정집의 가축우리에 누였습니다. 당시 가축의 여물통 구유는 주로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얼마나 차고 불편하며, 또 얼마나 비위생적인 상태였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낮고 천한 구유 역시도, 하나님은 메시아의 표적이라 하셨습니다. 짐승의 밥이 담기는 그릇에 누인 아기. 짐승이 먹는 밥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메시아. 죄로 인해 본래의 영광과 존귀함을 모두 잃고, 짐승이 되어버린 인간이 먹고 다시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위한 생명의 양식, 그것이 되기 위해 오신 메시아에게, 짐승의 여물통은 너무나 어울리는 요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여전히 미약한 우리들 속에, 그리고 연약하고 구질구질한 우리의 삶과 눈물 나는 일상 속에 계십니다. 화려한 성전에도 계시겠지만, 열다섯 명이 앉기에 비좁은 이곳에 주님이 오십니다. 강보에 싸인 아기로 오신 예수이시기에, 그런 우리의 삶을 무시하시지도 않으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나무라거나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연약함을 온전하게 하는 길, 연약함을 거룩하게 하는 길을 주님이 친히 살아내셨고,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강보 속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참으로 진실하게 주님을 원하며 살아가느냐, 그것입니다. 그 아기는 구주로 오셨지만 사람들의 환대나 환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 본문은 밤에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신약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목자들이란 가장 천한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직업적으로도 그렇지만, 종교적으로도 세리와 같은 취급을 당하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에도 밤에 양 떼를 지킨다고 하는 것처럼, 목자는, 그 직업의 특성 상 양이나 염소의 곁을 몇 날 며칠, 한시도 떠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거르기 일쑤였고, 세세하게 율법을 지키기도 어려웠으며, 율법에 추가된 여러 무거운 규칙들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새벽, 옆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인부들의 외침 소리가 오늘의 목자가 누구인지를 일깨웁니다.) 그런데 예수의 소식은 그들에게만 전해졌습니다. 어째서 당시의 가장 천하고, 율법적으로 가장 부족하던 목자들에게만 전해졌겠습니까? 그들의 삶이 가난하고, 그들의 마음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아닌 메시아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말했지만, 진실로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은 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이, 강보에 싸인 아기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하며, 아무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와 같은, 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로 먼저 오십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자리, 주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백하는 자리, 예수 외엔 아무 강보도 준비되지 못한 이들에게, 주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며 탄식하는 이들에게로 주님은 오십니다. 성탄절을 절기의 하나로 여기며, 그저 율법을 지키듯, 무심히 지내는 부유한 곳에 예수는 오시지 않습니다. 아니 오셔도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여관 문을 걸어 잠그고, 자신의 안방 문을 걸어 잠글 것입니다. 강보에 싸인 채, 구유에 누워 있을 메시아는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넉넉하고 부요한 사람, 스스로 강보를 벗고, 스스로 몸을 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벗겨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지막 남은 강보까지 다 벗겨 골고다에 주를 높이 세워두었습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환대하기는커녕, 주님의 강보마저 제비뽑으며, 주님의 수치를 가리던 그 마지막 강보마저 나눠 갖기에 급급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채로 오신 메시아는 결국 그 강보조차 내어주신 채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메시아를 기다리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필요하십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십니까?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 여겨지십니까? 여러분의 강보는 누구이며,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올해의 죄인 상’을 받기에 충분한 죄인이며,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이를 수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임을 인정하십니까? 주님의 은혜 없이는, 예수라는 강보, 보혈의 강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핏덩이에 불과한 존재가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이 질문에 진정으로 아멘이라 대답하신다면 여러분에게 오늘 이 날은 평화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죄의 몸과 가난의 현실 속으로 오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살아내시고, 싸우시고, 몸소 이겨내셔서, 우리로 아버지의 영광에 이를 길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비록 목자처럼, 연약하고 대단하지 못한 삶이어도, 우리는 능히 주의 일을 감당하며 살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은, 목자들이 마리아를 비롯한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에게, 천사가 자기들에게 전해준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9절에 보면 목자들이 전해 준 그 이야기를 마리아가 마음에 새겼다고 나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일에 목자들이 부르심을 받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처럼 연약한 존재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증언하십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그들의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를 만났으니 목자 일은 때려 치고, 좀 더 근사한 삶으로, 더 대단한 모습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일상으로, 목자의 삶으로 돌아가 주의 오심을 증언하며 살았습니다. 여전히 다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야만 하는, 퍽퍽하고 연약한 삶을 잠잠히 살아냄으로써, 그들이 본 표적 속의 메시아를, 삶으로 증언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여전히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젠 예수가 필요 없는 삶이 아니라, 믿으면 믿을수록 더 예수를 원하게 되는 삶 속에 우리는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잘못된 신앙도, 잘못된 삶도 아닙니다. 여전히 몸이 아프고, 여전히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 같은 우리의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도 메시아의 나라를 증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내년에는 더 주님을 기다리고, 더 원하는, 강보 속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온전히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강보 속 아기 같은 연약함에 좌절하지 말고, 그 삶이 표적이 되는 믿음으로 여러분의 일상을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주님을 증언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구유에, 여러분의 밥통에, 강보에 싸인 주님이 오셔서 임마누엘 늘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사랑하는 주님, 나의 강보가 되고, 나의 구유가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예수의 보혈이 우리의 유일한 강보이며, 예수의 찢긴 살이 구유 속 우리의 유일한 끼니임을 고백하오니, 이전보다 더 주님을 의지하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높은 데 마음 두지 말고, 목자와 같이, 주님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머물 수 있는 그런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지금도 싸늘한 구유 위에 놓인 이 땅의 연약한 영혼들과 여전히 차가운 바다에 몸을 누인 어린 영혼들을 주님 기억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주님의 참 된 위로가 충만하게 임하여 주옵소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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