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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들어' 2015년 10월 18일 주일 설교
2015-10-18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4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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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된 설교 원문
20151018 성령강림 스물두 번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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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1장 27절 ~ 12장 4절, [부활의 현실 살기 #78] 손을 들어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018.mp3
‘손을 들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낸 지난 한 주도 참 다사다난한, 일도 많고, 탈도 많은 한 주였습니다. 용인의 18층짜리 한 아파트에서는 길고양이들을 돌보는 이른바 ‘캣맘’ 한 분이, 아파트 옥상에서 누군가가 떨어뜨린 벽돌에 맞아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수사 끝에 범인이 잡혔는데, 뜻밖에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옥상에서 물체를 던지면 무엇이 먼저 떨어질까’를 두고 ‘낙하 실험’을 하던 중 옥상에 쌓여있던 벽돌 하나를 아래로 던졌다가 사고를 낸 것”이었습니다. 작은 어린아이의 손이, 엄청난 비극을 낳고 말았습니다.
훈훈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한 70대 아파트 경비원이 감전사고로 인해 쓰러졌습니다. 그걸 발견한 사람이 중년의 여성 관리소장이었는데요, 이미 호흡이 멈춰버린 경비원에게 지체 없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불과 보름 전, 공동주택 관리사 교육에서 잠깐 들었던 걸 기억해서, 무작정 손을 올리고 가슴을 눌렀습니다. 지나치듯 흘려듣고, 실습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사람이 쓰러지니 일단 가슴에 손부터 올리고 본 겁니다. 정확한 방법이나 요령 없이 그냥 무작정 수를 세며 반복해서 힘을 다해 가슴을 눌렀습니다. 119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경비원은 호흡은 없었지만, ‘심실세동,’ 그러니까 심장의 미세한 떨림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심폐소생술이 이 미세한 떨림이 꺼지지 않도록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경비원은 사고 여드레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현장 구급대원은, 만약 그녀의 심폐소생술이 없었다면, 심실세동 상태가 완전히 무수축 상태로 변경되어, 소생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방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꼭 살려야겠다는 의지가 담긴 손 하나가 귀한 생명을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든 손도 있지만, 역사를 살리기 위해 든 손도 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 횡단보도 앞에서,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큰 종이 한 장을 높이 들었습니다. 앞에는 “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합니다.”라고, 뒤에는 “대통령님, 저희는 올바른 역사를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삼성고등학교 2학년 이다혜 양인데요, 하교 후 하루 세 시간씩, 그렇게 그녀는 어른들도, 목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장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그 피켓을 든 작은 손이 다름 아닌 역사를 살리는 손일 겁니다.
이제 여러분의 손을 한 번 보십시오. 그리고 한 번 어루만져 보십시오. 지난 한 주, 저와 여러분은 이 두 손으로,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들고 던지고, 또 무엇을 만지며, 무슨 일을 실행해 왔습니까? 그 손이 써내려간 한 주의 역사 속에는, 무엇이 담겨져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에는 두 사람의 손이 대조적으로 등장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11장 마지막과 12장 처음은, 비록 장(章)의 큰 구분이 존재하지만,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두 사람의 손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11장 마지막에 기록된 바나바와 사울의 손, 그리고 12장 처음에 나오는 헤롯의 손, 12장 1절의 ‘그 때에’라는 말을 통해, 둘이 아닌, 하나의 그림 안에서 뚜렷이 대비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이 손이라는 말은 사족처럼 느껴집니다. 그 말을 빼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11장 30절에,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냈다고 성경은 기록하지만, 굳이 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냥 ‘두 사람을 통해 부조를 보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안디옥 성도들의 사랑과 믿음이 담긴 부조를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에게 건넬 때, 손이 아닌 입이나 발로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장의 헤롯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절의 ‘손을 들어’라는 말 자체를 빼도, 내용에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사람을 처형하는 건 손이지 다른 신체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빼고, “그 때에 헤롯왕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라고 적는 것이 더 간결하고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은 따로 있고, 헤롯이 스스로 칼을 들어 직접 야고보를 내리쳐 죽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중복되어 표현이 된 건, 사울의 경우나 헤롯의 경우나, 모두 ‘손’이라는 말이 들어간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우리 감각기관과 관련되어, 사족 비슷한 표현들이 종종 등장합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더듬어 보시면, 성경에서 ‘눈을 들어 본다’는 표현을 자주 보셨을 겁니다. 신구약에 걸쳐 수십 번 이상 등장합니다. 우리는 눈을 들 수도 없고, 실제 드는 것은 우리의 얼굴과 머리인데도, 그리고 굳이 눈으로 본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뭔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는 행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주목하여 보는 행위를 강조할 땐, ‘눈을 들어 본다’고 성경은 적습니다. 사족 비슷하지만 사족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입을 열어’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때와 같이, 사람이 주체적인 의지를 담아,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말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을 말하는 순간에, 이런 표현을 씁니다. 입을 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음에도, 굳이 ‘입을 열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 무언가를 더 전달하고자 하는, 행간의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의 손을 든다는 표현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사울의 손을 통해 예루살렘에 전달되는 안디옥의 ‘디아코니아’ 곧 ‘부조.’ 헤롯의 손을 통해 실행되는 야고보의 처형, 모두에서 ‘손’은 단지 신체의 일부로 등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삶, 그리고 신앙을 그려내는, 일종의 제유(提喩)이자, 그런 그들의 삶과 행위에 대한 성령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사울과 헤롯의 손이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사실 처음 사울의 손은 헤롯의 손이었습니다. 안디옥 성도들의 섬김과 사랑이 담긴 손이 아니라,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던 사람들의 옷을 맡아 주던 손, 그 박해 현장의 증인의 손이 사울의 손이었습니다. 스데반을 계기로 더 많은 성도들을 잡아 결박하기 위해 더 큰 칼을 손에 든 것도 오늘 헤롯과 닮아 있었습니다. 살기가 등등한 채, 한 손에는 대제사장에게 받은 체포 영장이,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었던 손이 바로 사울의 손이었습니다.
그 같은 손에 이제 생명을 살리는 부조, 생명과도 같은 부조가 들려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 가는 유대의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 역시나 기근으로 고생하는 안디옥 성도들의 생명과도 같은 물질이, 바로 그 사울의 손 하나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부조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니아’ 자체가 섬김, 손을 의미합니다. 이중의 손입니다. 손이 손을 담고 갑니다. 이처럼 사울의 손은, 주님을 만나 회심한 그의 인생의 변화, 그 거듭남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증언하는 증거물입니다.
사울의 손은,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열매가 맺혀지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회개는 결국 손이 하는 겁니다. 머리로, 가슴으로가 아니라, 결국 손으로 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머릿속엔 예수가 살고, 가슴속엔 성령이 사는데, 손은 여전히 헤롯의 손으로 산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은 뭐든 말로 만드는 게 아니라, 손으로 이룹니다. 이걸 잊으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게 목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 득도의 종교는 결국 하나님처럼,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 입과 가슴과 머리에 있는 신앙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가는, 그의 손이 결정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손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손으로 예수를 믿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도, 머리가 아닌 손으로 받아야 합니다. 손이 움직일 생각을 하고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가 되는 것만을 순종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거나 모자랄 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나 아내가, 남편이, 내가 이해하기 힘든 일을 부탁하거나 요청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일단 하고 봅니다.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깨달아서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고 깨닫는 게 우리의 신앙일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신앙의 초기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믿음이 흐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믿음은 손에서 시작해서 머리와 가슴으로 흐릅니다.
예전부터 머리로만 예수를 믿는다, 머리로만 말씀을 이해한다, 그런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요즘은 머리도 아니고, 아예 귀로, 눈으로만 말씀을 받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걸로 만족합니다. 눈으로 세상을 보는 데만 익숙해진 현대인들을 일컬어, 한 시인은 ‘호모 텔레비우스’라 칭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 그러하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손으로 읽고 손으로 전합니다. 우리의 손이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 손을 보여주시며, 당신이심을 믿으라 하셨던 것처럼, 부디 우리의 몸과 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그런 진정한 신앙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노동이 타락한 결과, 손을 쓰는 일보다 머리를 쓰는 일이 대접받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가치와 존엄이, 손에서 머리로 옮겨가는 역사, 손이 점점 비루해지는 역사가 인간이 걸어 온 역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그리고 오늘날 정말 인간을 존중하는 사회는 그렇지 않지요. 어떤 분야나 집단에서 기술이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을 일컬어 ‘고수’(高手)라 합니다. 영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master-hand라는 말은 명인, 리더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모두 손이 존중받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손이 무시당하고, 머리가 인정받는 사회에서 살아갑니다. 노동자는 손으로 일하고, 고용주는 입으로 일합니다. 블루 컬러는 손으로, 화이트 컬러는 머리로 일합니다. ‘수족처럼 부린다는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그러니 다들 머리가 되려고 하지 손이 되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이 사회에서, 손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의 상징물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자꾸 이 사회를 닮아갑니다. 머리로 예수를 믿고, 입으로 예수를 믿는 게 고상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어이 세상의 머리가 되려고 하고, 하나님마저 내 수족으로 부리려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린 대로 그런 신앙은 진짜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사울과 헤롯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다른 삶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똑같이 손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손을 사용하는 그 사람의 정체성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손을 드는 주체가 헤롯인 반면, 사울과 그의 손은, ‘사울의 손으로’라는 말처럼, 일종의 수단이 되어 있습니다.
헤롯의 손은 왕으로서의 헤롯, 주체로서의 헤롯을 보여줍니다. ‘손을 든다는 행위’는 철저하게 주체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손은 그런 주체의 손이 아닙니다. 사울의 손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여가는 하나의 운반자에 불과한 손입니다. 그래서 그 손은 드는 손이 아니라, 그 손에 들려 있는 것에 묶여 있는, 제한적이고 부자유한 손입니다. 내가 손을 들고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손이 아니라, 누군가의 영향 안에 들어가, 그 누군가의 뜻에 철저하게 포섭되어 있는 손입니다. 사울 스스로 뭔가를 하는 손이 아닙니다. 그저 담고 나르는 손, 더 쉽게 말해 심부름하는 손입니다.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 내용물을 흘리지 않고 잘 운반하면 그것으로 사울의 손의 역할, 사울의 역할은 끝납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이고, 철저하게 겸손합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손은 그 자체로 교만입니다. 내가 타인의 생명줄을 쥐고 있고, 그 타인을 향해 내 힘을 가하여 목적을 이룹니다. 내 목적을 위해 타인은 내 손에 의해 희생됩니다. 헤롯의 손은, 내가 얻을 작은 유익을 위해, 타인의 생명도 해하는 교만하고 무자비한 손입니다.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손은 사용되고, 스스로 목적이 되는 손입니다.
사울의 손, 운반자의 손은 내 의지와 목적을 담을 필요가 없습니다. 보낸 자의 목적이 아니라, 보냄 받은 자의 목적이라는 것이 손에 담기면, 본래의 최초 보낸 이의 목적이 오히려 제한을 받습니다. 사울의 손이 주체가 되는 순간,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시간은 지체되고, 그곳의 생명들은 가난의 고통을 더 오래, 더 심하게 겪게 됩니다. 사울의 손은 겸손할 때, 수단이 될 때, 가장 밝은 빛을 발하는 손입니다. 우리의 삶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성숙은, 헤롯의 손에서 사울의 손으로의 변화입니다.
담고 전달하는 손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이기에, 성도의 목적은 뭔가를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우는 것,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무엇이든 담을 수 있도록,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목적인 삶을 삽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4:8)고 말합니다. 손에 채우고, 손으로 뭔가를 이루는 데 집중된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정결케 하는 데 쏟는다면 분명 우리도 주님의 삶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의 성육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스스로 수단이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이신 하나님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그것이 예수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목적의 자리에서 내려와 수단이 됩니다. 사람을 찾고 섬기는 예수의 손은 더 이상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 왕의 손이 아닙니다. 나무에 달리기 위해 못이 뚫고 들어가야 하는, 죄인의 손, 그것이 예수입니다. 그 손은 십자가를 들어 올리는 손이 아니라, 십자가에 묶이고, 박혀지는 손입니다. 하나님은 그 손을 통해 생명을 구하고, 보존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 속에서 중요한 때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주님의 손에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게 전달되는 것은, 그분의 손, 그분의 touch였습니다. 주님이 ‘처음’ 병든 자를 치료하시던 대목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 주님은 그냥 말씀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손을 그들의 몸에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터치하지 않는 나병 환자의 몸에, 전염될까 두려워 맞잡아주지 못하는 열병 환자의 손에, 주님은 손을 대심으로 그들을 치유하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할 때에도 주님은 ‘손으로’ 그들을 위로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변화산에 주님과 함께 올라간 제자들이 빽빽한 구름과 큰 소리에 놀라 심히 두려워할 때, 주님은 조용히 그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시며, (내가 곁에 있으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touch에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이 일어나 ‘눈을 들어’ 주님을 제대로 바라봅니다. 주님은 오늘도 그때 그 손으로 저와 여러분을, 우리의 삶을 touch 하시며, ‘내가 여기, 네 곁에 있다. 염려하지 말아라’ 말씀합니다.
그 주님은 세상으로 보내어지는 제자들을 향해, 머리가 되고자 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는 말씀은, 오늘 메시지 속에서, 너희 중에 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손이 되어야 하리라, 이렇게 읽힙니다. 손을 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손으로 머무는 사람이 머리가 되는 나라, 그것이 주님의 나라이고, 천국이라 말씀합니다. 여러분,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준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머리입니까, 손입니까?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머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손입니까? 우리 서로를 위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우리 공동체의 머리입니까, 손입니까?
손이 천대받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그런 공기를 매일 마시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기에, 우리 안에는 여전히 내가 주인이고자 하는 마음이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셔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손이 회개하는 참 된 신앙에도 이를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의 손, 세상의 손으로 부르시는 그 부르심에도 응답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오늘도 하나님은 친히 당신의 손길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어루만져 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이며,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로 이 땅에 부르심을 받았는지, 우리의 이 작은 삶이 얼마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낼 수 있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touch 하시며,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지금도 그 주님의 손길이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살아갈 용기, 머리가 아닌 손으로 주의 말씀을 살아낼 용기를, 부디 주의 성령이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서두에, 광화문 광장에서 종이를 든 이다혜 학생 이야기를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학생의 손만큼은 아니어도, 또 하나 아름다운 손이 있습니다. 그 학생에게로 다가와 말없이 음료수 하나를 내미는 행인의 손입니다. 뭔가가 담긴 검은 봉지를 건네는 아주머니의 손도 있고, 힘내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다른 학생의 손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때론 그런 손 하나여도 좋겠습니다. 우리의 손이, 잘 하는 사람 응원하고 격려하는 손이라도 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깨끗한 손이 될 겁니다.
너무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부디 여러분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오늘 이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리는 흩어지고, 생각은 지워지지만, 몸은 흔적을 지닌 채 역사로 남습니다. 작은 우리의 행함들이 날마다 모이고 쌓여, 우리 인생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손으로 수고하고 애쓰며 살다보면, 언젠가 만날 우리 하나님의 손에 새겨지는 손금처럼, 우리의 삶이 영원 속에 남아 있으리라 믿습니다. 머리가 아닌 손이 되기를, 머리가 아닌 손으로 사랑하기를, 그렇게 주님께 손으로 기억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