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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실행하여' 2015년 10월 4일 주일 설교

2015-10-04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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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4 성령강림 스무 번째 주일 --------------------------------------------- 사도행전 11장 27~30절, [부활의 현실 살기 #76]  작정하고 실행하여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1004.mp3 ‘작정하고 실행하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결심한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하고 곧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본래 이 말이 생긴 기원은, 사흘을 두고 고심한 끝에, 비로소 마음을 작정한다는, 생각과 결정의 신중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빨리 생각하고 빨리 결정하기를 강요하는 현대에는, 오히려 이런 본래의 작심삼일이 없어서, 대부분의 결단이 작심삼일로 끝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삶의 열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계절, 유독 그런 생각이 더 듭니다.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단하는 것과 우리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지 모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그래, 그렇게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생각 없이, 말씀을 붙들고 하는 기도 없이, 그렇게 한 주를 살아가다 보면, 그 말씀들은 이미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설교자인 저도 그렇습니다.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 집에 돌아갈 차 안에서, 제 마음은 벌써 다음 주 설교 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하고 들은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여 결단하는 기회가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제대로된 작심의 부족함이야말로, 믿음과 행함이라는 오랜 과제 앞에서 우리를 왜소하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말씀을 듣고 결단하는 것, 작심삼일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들은 자리에서 생각과 결단의 과정을 모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 돌아가서, 다시 홀로 말씀을 곱씹으며, 내 삶에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작심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반추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말씀에 머문다는 것,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일 겁니다. 제대로 된 作心 말입니다. 빨리 작심하고 빨리 그만두는 것이 익숙한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안디옥 성도들의 모습은 또 한 번 도전을 줍니다. 29절에 보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행은 30절에 나옵니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보냈다.” 되어 있습니다. 작정과 실행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작정하고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을 실행하였음을 나타내는, 저자 누가의 세심한 표현입니다. 작정에서 실행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힘, 성도의 힘,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초점은 물론 실행에 놓이게 되지만, 그러나 저는 여기 ‘작정’에서부터 먼저 큰 감동이 느껴집니다. 아가보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안디옥에 와서, 천하에 큰 흉년이 있게 될 겁니다, 예언한 것이 글라우디오 황제 때, 실제로 일어났다고 28절은 기록합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하던 14년 간 4번의 큰 흉년이 있었다고 역사는 증언하는데요, 특별히 요세푸스가 쓴 ‘유대 고대사’라는 책 15권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해가 주후 46년이었다고 나옵니다. 약 3년 간 이어진 이 흉년으로 인해, 유대 땅은 물론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는데요, 28절에 ‘천하’에 큰 흉년이 들겠다는 말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안디옥의 성도들이 한 작정은, ‘아껴서 잘 살자’라든가, ‘잘 견디자’가 아니라, 먼 유대 땅에 사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 기근은 유대 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안디옥도 상황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럼에도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의 방향은 안디옥이 아닌 유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 중심의 안디옥 교회에서 볼 땐, 자신의 동족도 아닌 유대 땅입니다. 그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의 거리는 자그마치 500km입니다.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멀어도 한 참 멀리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안디옥의 성도들은 그와 같은 작정을 한 겁니다. 29절에 보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전체의 정책이나 결정이 아니라, 성도들 각자의 자발적인 헌신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각각 자신의 힘대로, 스스로 판단하여 작정했습니다. 강요나 의무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신앙적 판단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작정했습니다. 사는 게 힘들어지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안위와 미래를 걱정하고 그에 합당한 결단을 내립니다. 어디서 얼마를 더 아끼고, 얼마를 비축해서,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를 생각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겁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더 힘든 사람을 섬길 생각을 하는 건 분명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안디옥의 성도들,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안디옥의 교회, 그래서 참 도전이 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함께 사역한 지 1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들의 리더 바나바가 워낙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24절)이어서였을까요, 그에게 말씀을 배운 안디옥의 성도들도 그랬습니다. 멤버는 리더를 닮아가기 마련인데요, 그래서 저도 정신이 번쩍 드는 대목입니다. 목사를 위해서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어쨌거나 세워진 지 1년 된 교회가 수천 년 하나님을 믿어 온 교회와 성도들을 돕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나보다 더 연약한, 더 힘들 사람을 떠올리는 역발상,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신 일곱 개의 말씀, 가상칠언에 보면 처음 세 말씀은 모두 다른 누군가를 향한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 말씀들 바로 다음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버렸다는 절망과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당신 자신이 아닌, 주변을 먼저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엊그제 이른 아침에 호수 공원을 뛰면서 노부부 한 커플에게 제 시선이 멈췄습니다. 다리가 조금 불편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두 분이 검은 봉지 안에 뭔가를 열심히 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은행 같은 열매를 주워 담아가시려나보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청소하시는 분들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공원의 구석구석을 두 분이 같이 다니시며 그곳의 쓰레기들을 주워 담고 계신 거였습니다. 두 봉지가 가득 채워지자 두 분은, 손 하나씩 나눠잡으시고 나머지 손에는 그 봉지들을 하나씩 들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 가져다 버리시곤, 아픈 다리를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계시는 모습을 저는 한참을 지켜보다 왔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고난에 처했다 느낄 때, 나에게 매몰되지 않고 주변을 먼저 돌아보는 마음, 그게 제대로 된 은혜요, 성숙한 믿음입니다. 우리에게도 그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 노부부가 그 일로 인해 베푸는 것만큼이나 얻으시는 것도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부부가 좋은 공기 마시며 산책을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러하고, 불편한 다리이지만, 그렇게 움직이셔서 운동하시니 그것도 좋고, 그 일을 통해 남들이 가질 수 없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더욱 느끼게 되시니 왜 아니겠습니까? 두 분의 그 섬김이 두 분 자신에게도 큰 힘과 능력일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은혜, 신앙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안디옥의 성도들이 작정한 그 마음이 어쩌면 안디옥 성도들을 더욱 깨어 있게 만들고, 더욱 힘을 내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래, 우리가 힘을 내서 유대를 도와야지. 우리라도 더욱 아끼고 노력해야지. 유대까지 도우려면 더 힘을 내야해’ 하는 결단이 그들을 더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더욱 엎드리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성도가 은혜로 산다는 게 그런 겁니다. 지난 주 사울을 위한 바나바의 삶에서 본 것처럼, 나를 위해 발버둥치며 사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자 애쓸 때 성도는 비로소 더욱 온전해지고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제가 어렵다 하고, 또 앞으로도 더 어려워질 거라 말합니다. 천하의 큰 흉년만큼은 아니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어려움이 우리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와 여러분의 생각은 어디로 향해 있습니까? 더 어려움을 당할 이웃과, 더 힘든 과정을 견뎌내야 할 다른 교회를 향해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나 한 몸을 위한 생각과 작정에 매몰되어 있습니까? 요즘 기독교 신문에는 힘든 형편의 교회와 목사님 가정들에 대한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작은 교회를 꺼리게 되고, 그래서 그런 교회들은 재정적으로 더 어려워져서, 결국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사역을 포기하는 목사님들이 늘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 하나만으로는 도저히 자녀들 뒷바라지 할 수 없어 두 가지, 세 가지의 일들을 동시에 하는 목사님들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면서 건강과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젠 아예 총회에서 목사들을 대상으로 한 직업교육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공론화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저희 교회 비전 열 가지 가운데 여덟 번째가 이것인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크고 넉넉한 교회보다, 교회를 섬기는 작은 교회를 지향한다.”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교회, 그것이 처음 고백교회가 세워질 때 주신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떻게 살아남지?”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시절에도 나 아닌 더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섬기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먼저 할 수 있는 은혜, 비록 연약하나 그 연약함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오병이어의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견고한 은혜가 오늘 고백교회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년 정도 전에 우리가 함께 작정했던 한 가지 이야기를 이 시간에 좀 하려고 합니다. 지난 성탄절,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 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면서, 구약의 화목제 이야기를 했습니다. 400근이 넘는 소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데, 하나님은 정작 내장이나 기름만 받으시고, 나머지는 하루 혹은 이틀 안에 모두 먹으라고 율법은 규정합니다. 하루나 이틀이니 멀리 사는 사람에게 선물할 수도 없고, 가까이 있는 지체들, 이웃들과 최대한 많이, 빨리 나눠 먹는 것, 그러면서 비단 하나님과의 화목만이 아니라, 가까운 이들, 어렵고 힘든 이들, 고기 구경 못하고 사는 이웃들과의 진정한 화목을 이루어가라는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작정했지요. 우리가 가진 소득의 3% 정도는 꼭 화목헌금으로 드려서, 화목케 하라는 그 직분에 합당한 섬김으로 서로를 대하자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 작정이 과연 얼마나 실행으로 옮겨졌을까요? 화목예물을 처음 드리기 시작한 2015년 1월에는 다섯 분이 동참하셨고, 2월에는 두 분이, 3월에는 네 분, 4월에는 한 분, 5월에도 한 분, 6월에 두 분, 7월에 두 분, 8월에 두 분, 그리고 지난 9월에 딱 한 분이었습니다. 1월부터 3월까지 열한 분이 동참해 주셨는데, 4월부터 9월까지는 아홉 분입니다. 우리의 작정이 점점 작정으로만 끝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각자의 삶이 모두 힘들고 버거워서일 겁니다. 나 하나의 삶을 챙기기도 벅찬 시절에, 화목 예물이라는 것이 내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하긴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29절은 말합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작정했다고 말입니다.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렇게 각자의 힘에 따라, 기쁨으로 한 것입니다. 문제는 작심이고, 실행이지, 우리의 형편이 아닌 겁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화목 예물을 드리신 분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만원 단위로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각자의 형편대로, 때로는 천 원, 때로는 오백 원이라도, 우리의 작정이 작정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9절에서 30절로 넘어가서, 이를 실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작정하고 실행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작은 실행들이 습관으로 이어지면 결국 그 사람의 인격이 됩니다. 작지만 그 힘대로 꾸준히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이 훗날 더 큰 주님의 부르심에도 순종할 수 있는 온전한 마음이 될 겁니다. 부디 다시 주님의 말씀 앞에 결단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성경 한 구절만 더 찾아 읽고 말씀을 갈무리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입니다. 신약성경 293쪽, 1절부터 2절입니다.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후서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쓴 편지입니다. 1절의 형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겠지요. 또 마게도냐 교회들이 나오는데, 오늘로는 터키 지역에 해당하고, 여기에 속한 교회들로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에 관해, 특별히 그들의 풍성한 연보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연보(捐補)는 본래, ‘자기의 재물을 내어 다른 사람을 도와준다’는 뜻을 가진 한자어로 연조(捐助)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나오는 ‘풍성한 연보’ 역시 앞서 우리가 살펴 본 기근에 따른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한 부조를 의미합니다. 기근의 세월이 계속 이어졌고,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만이 아니라 인근 여러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작정과 실행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들 역시도 극심한 가난과 환난의 많은 시련이 있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예루살렘이나 안디옥이나 데살로니가나 고린도나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다른 교회를 위해 섬겼다고 바울은 말하는데요, 3절을 보면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대로 하는 것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이었다면 마게도냐 교회의 모습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힘에 지나도록 자원한” 것입니다. 힘에 부치도록, beyond their power, 능력 이상으로, 그들은 먼 교회의 성도들을 돕는 데 힘썼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여기 ‘성도 섬기는 일’이라는 말이 사도행전에서 본 바로 그 부조라는 의미의 ‘디아코니아’입니다. 봉사, 섬김으로도 번역하지요. 마게도냐 성도들은, 우리도 그 부조에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울에게 청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너무 힘드니까, 당신들은 이 일에서 빠지시오, 바울이 말했는지 모르지만, 마게도냐의 성도들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참여할 수 있도록 간절하게 요청한 겁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여기 4절에 작은 힌트 하나가 나옵니다. 지금 개정 성경에는 정확히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공동번역이나 새번역, 혹은 다른 영어 성경에 보면 여기엔 없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이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NLT 성경에는, ‘the privilege’라고 옮겨져 있지요. 마게도냐 성도들은 다른 성도를 섬기는 일, 부조하는 그 일을, 의무가 아닌 성도들의 특권으로, 특별한 권리라고 여겼습니다. 그걸 특권이라 여기니 자원하여 섬기고, 특권이니 힘에 부치도록 섬기는 것이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무에서 특권으로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성도의 진정한 회심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특권을 주셨다고만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빌립보서 1:2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특권,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예수 전한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당하던 사도들은, 예수를 위해 능욕 받는 일에 내가 합당한 자로 하나님이 여겨주심에 대해 기뻐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특권이라는 것이 여러분은 믿어지고 고백되십니까? 고난을, 섬김을, 특권으로 여긴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정반대일 때가 훨씬 더 많지요. 특권인데 의무로 말입니다. 기도도, 예배도, 주일을 지키고, 물질을 드리며 헌신하는 것들도,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도, 어느 순간 의무로 전락해 버립니다. 특권이 의무가 되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로 전락하고 말고, 그 공동체 역시 감동도 힘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신앙의 내용이 특권이 된다는 것은, 나에 대한 새로운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자녀라는 권세, 그 특권에서 이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이번 추천도서 ‘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해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눠드린 내용은, 그 그림의 한 부분에 대한 클로즈업인데요, 그림을 잠깐 보시면, 우선 아버지의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박박 깎여진 머리, 누더기 같은 옷, 다 헤어진 샌들, 상처로 진물이 흐르는 왼발, 모두 비참하게 무너진 한 사람의 인생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지금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한 가지 물건이 아들의 몸에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아들 오른쪽에 붙어 있는 작은 칼입니다. 이 칼에 대해 저자인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것이 칼 한 자루 말고는 모든 걸 탕진한 젊은이의 초상입니다. 남아 있는 품위의 상징이라고는 달랑 엉덩이에 매달린 단검이 전부입니다. 신분을 나타내는 일종의 배지인 셈입니다. 비록 삶의 밑바닥을 헤매면서도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만큼은 한사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자 관계를 증명해주는 그 소중한 칼마저 팔아치웠을 겁니다. 작은 아들의 단검은 비록 거지꼴을 하고 부랑자 신세가 되어 돌아왔을망정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걸 잊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아들’이라는 신분을 한시도 잊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했던 탕자의 마음가짐이 고향을 향해 발길을 돌리도록 이끌었던 겁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 칼을 내다 팔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내가 부족하고 형편없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또 다시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만유의 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는 그 믿음이 우리를 존귀한 자리로 되돌아갈 소망을 부여합니다. 아버지의 자녀임을 보여주는 그 칼, 그 자존감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신앙의 노블레스(noblesse)의 근원입니다. 물질을 많이 쌓아놓고 사는 게 복이요, 존귀함이라 여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이사야 32:8에서,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말씀합니다.(Repeat) 여러분은 어떤 존귀함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돈을 조금 더 벌기 위해, 조금 더 나은 형편에서 살기 위해, 여러분 우측에 매여졌던 아버지의 그 칼을 가장 먼저 내다 팔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구이며, 누구의 자녀인지,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세상은 의무라 말하는 그것이 우리에겐 권리가 될 수 있는 영적 자존감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드린 대로 힘든 순간은 언제나 찾아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존귀한 일을 계획하며, 존귀한 자리에 설 기회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힘든 순간에 처할 때마다,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살피고 섬길 기회라 여기며 기뻐할 수 있는 데까지 자라가십시다. 존귀한 자로서, 존귀한 일을 작정하고, 그 일을 실제로 실행해 갈 수 있는, 그래서 존귀한 자로서 당하는 이 땅의 여러 불편함들을 우리의 특권이라고까지 고백할 수 있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와 위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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