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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로 설명하여' 2015년 7월 5일 주일 설교

2015-07-05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7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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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5 성령강림 일곱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 사도행전 11장 1~18절,  차례로 설명하여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705.mp3 성령강림 일곱째 주일 말씀으로, ‘차례로 설명하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고, 소리 소문보다 빠른 게 없다는 말처럼,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 사건 역시 아주 빠른 속도로 교회 안에 퍼져나갔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했는데, 2절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에 이미 다 그 이야기를 들은 뒤였습니다. 베드로의 발걸음보다 소문이 훨씬 빠른 거지요. 그런데 그들은 단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만 듣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향한 비난의 준비까지 이미 다 마쳐놓은 상태였습니다. 여기 2절에 ‘비난하여’에 쓰인 헬라어가 ‘디아크리노’인데요, 이 단어가 사실은 내포된 의미도 다양하고, 또 오늘 설교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디아크리노’의 어근이 ‘크리노’니까, 우리가 보통 영어에서 ‘비난하다’라고 할 때 ‘criticize’의 그 어원입니다. 그런데 ‘크리노’ 앞에 ‘디아’라는 접두사가 붙어 있어요. ‘디아’는 영어의 ‘through’입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내내, 줄곧, 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결과로 생기는 구별도 의미로 가지고 있습니다. 관통해서 길을 내면 결국 둘로 갈리니까요. 그래서 이 단어 ‘디아크리노’는 그냥 비난하는 게 아니라, 서로 편을 가르며 비난하는 겁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너는 잘못했고, 나는 아니다. 너는 틀렸고 나는 맞았다, 이렇게 서로를 배제하며 비난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판단하다’나 ‘차별하다’라는 말로도 옮겨지는 단어가 바로 이 ‘디아크리노’입니다. 사실 비난도 무섭지만 이렇게 판단하여 차별하며 비난하는 게 정말 무섭습니다. 요즘 동성애 논란이 화두인데, 그 진행되는 상황이 딱 이 ‘디아크리노’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더 나은 합의를 위해 하는 비판이 아니라, 일단 편을 가르고 정죄부터 하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편을 가르고 비난하면, 거기서 사람의 마음이 바로 닫혀버리지요. 더 말하고 싶지도 않고, 더 나누고 싶지도 않아집니다. 디아크리노, 이것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에 대해 예루살렘의 성도 일부가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교제를 나눴다? 그럼 베드로도 반대편이 되는 겁니다. 그걸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 여기 ‘비난’인 것이지요. 지난 주 말씀처럼, 베드로가 거기 며칠 더 묵기라도 했으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그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해 2절은 ‘할례자들’(페리토메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따로 부르는 명칭이 있는 걸로 볼 때 예루살렘의 모든 성도들이 할례자들인 것은 아닐 겁니다.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또 무시하는 유대인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특별히 할례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이방인이 회심을 하고 교회에 등록할 때, 반드시 할례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바로 이 ‘할례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있다, 그런데 그러려면 반드시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선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그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런 논리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 유대교의 입장이기도 했지요. 구약 시대에도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아주 간혹 있습니다. 그때 할례가 필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방인들, 유대인으로 피를 바꿀 수는 없으니까, 유대인의 표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유대인이 지키는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안 하면 다 ‘무할례자’가 됩니다. 아무리 착하고 경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3절에 ‘무할례자’ 이렇게 나오지요? 아예 선을 그어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디아크리노’의 전형입니다. 나는 할례자, 너는 무할례자, 그렇게 건널 수 없는 강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사실 베드로 입장에선 답답하고 억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걸 내가 하고 싶어서 했나, 성령이 시켜서 한 것인데, 아예 내 코를 꿰서 고넬료 앞에 데려다 놓은 셈인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누군 그것이 자연스러웠나? 나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거든. 근데 어떻게 해?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을.’ 속으로 그런 말을 되뇌며, 베드로는 억울해 했을 겁니다. 베드로 입장에선 충분히 억울할 만한 상황입니다. 더구나 여러분 이러한 비난은 사실 아무리 여기가 교회라고 하지만 도가 지나친 면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교회의 리더인데, 배신도 유분수이지, 어디 감히, 그럴 수가 있나, 베드로로서는 괘씸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배신의 정치’가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데, 어디 감히, 이런 말이 나올 법한 상황입니다. 리더가 뭘 잘못했어도, 먼저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비난부터 해대는 겁니다. 아마 오늘 한국 정치 상황이었다면, 바로 보복성 인사가 들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마음이 많이 불편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게 더 컸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어디 휴가 가서 놀다 왔습니까? 정말 긴 거리, 긴 시간을 죽도록 고생해서 수고하고 애쓰며 선교하고 돌아왔는데, 교회의 성도들이 격려하고 위로하고 잘했다고 칭찬해도 모자란 일입니다. [단기 선교 다녀올 때 온 성도들이, 청년들이 모여서 환영해주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비난하고 선을 긋다니요. 아무리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베드로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옵션은 대략 두세 가지 정도입니다. 먼저 교회 리더로서의 권위로 그러한 의견을 무시하고 다음 스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반대와 비난이 절대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교회 내 소수의 견해임을 생각해서, 그냥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비난할 사람은 항상 비난한다, 무슨 일이나 반대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무시해버립니다. 또 한 가지 옵션은, 하나님이 하셨는데 무슨 소리냐, 이제는 성령 안에 너희가 이방인이다, 정신 차려라, 이렇게 호통을 치며 오히려 이쪽에서 선을 그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다, 부족하고 연약하다, 뭘 모른다, 그렇게 규정하고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남아 있는 세 번째 옵션, 제3의 길은,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저 분열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일치에 이르는 긴 씨름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평소에 갈등이 생길 때 어떤 옵션을 선택하십니까? (*) 물론 누가 봐도 이 제3의 길이 좋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이 길을 택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시간과 싸우며, 뭔가 가시적인 효과가 바로 나타나야 하는 시대, 효율성과 실용주의에 근거한 이 시대에 이러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자칫 하면 갈등의 미로에 갇혀서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옵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바로 그 힘든 제3의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보시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몇 주에 걸쳐 살펴 본 그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여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베드로가 차례로 설명했다’는 말씀에 정확히 부합하는,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반응하고 있습니다. 여기 4절을 가장 잘 번역한 것이 사실 공동번역인데요, 거기엔 이렇게 옮겨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처음부터’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르카메노스’가 잘 표현되어 있고, 길게 기록된 본문의 내용을 잘 요약하는 그런 번역입니다.) 실제로 본문의 내용은 매우 자세하고 세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본문의 내용을 묵상하고 이미 다 알고 있는 저희로서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실 기록의 측면에서 보면 좀 과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베드로가 했던 그 모든 설명을 생략하지 않고 다 반복해서 기록해두고 있습니다. 그냥 이전에 있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가 그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해 주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차례로 설명하지, 강요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비난에 비난으로 맞서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목사인 제가 가장 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분을 천천히 설명하고 이해시킵니다. 자신도 부족한 사람이었고, 이 문제에 있어서 지금 할례자들과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고백하며, 논리로 이기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하며 공감을 먼저 이루어갑니다. 논리로 논리를 깨서 이기는 그런 과정이 아닙니다. 결국 할례자들이 베드로의 말에 공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것은 그들이 패배자로 난처하게 만드는 결론이 아닙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베드로를 비난한 할례자들에 태도에 대해서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를 처음에 비난했지만, 이후엔 베드로의 긴 이야기를 그대로 들어주고 있습니다. 중간에 말허리를 자르고 감정적으로 반응하지도 않고, 끝까지 베드로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이것도 너무나 중요합니다. 끝까지 듣고만 있어줘도 서로 마음이 헤아려지고, 적어도 불필요한 오해는 사라집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우리는 끝까지 들어주지도 못합니다. 할례자들은 베드로의 이야기를 견뎌줍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하는 말의 진실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18절 마지막은 그들이 더 이상 비난의 말을 이어가지 않고 침묵한 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합니다. 사람을 향한 비난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람이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결론, 그것이 오늘 이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집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이와 정반대로 나아가게 되는지 모릅니다. 처음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시작해서, 사람을 향한 비난으로 끝나는 일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모인 교회가, 서로 다른 의견의 충돌과 신앙적 관점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고 멀리하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사분오열, 찢어지고, 편을 갈라 서로를 마귀 사탄으로 정죄해 버립니다. [지난번에 오셨던 남매 지체들] 논의의 결말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던 소리 대신 사람이 영광을 받고,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일이 얼마나 한국교회를 멍들게 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 고백교회는 그러지 않는지, 실로 우리가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갈수록 사람의 소리는 잠잠해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송으로 마무리되는지, 누가 누구를 설득하고 이기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은 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돌아볼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님의 인격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어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이야기에 우리의 신앙이 자존심 상해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정반대이지요. 사실 여러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런 말들은 베드로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말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즉시로’, ‘곧바로’, ‘흥분하여’, 뭐 이런 단어들이 오히려 베드로를 설명해주는 말입니다. 주님이 3년 간 함께 사역하실 때 베드로의 모습이 항상 그러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주님 잡혀가실 때 칼을 휘두르며 가장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이도 베드로였습니다. 리더의 경청과 친절한 반응, 차분한 설명, 이런 것들과 베드로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베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성령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신 이 일에서만큼은, 베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성도들 앞에 서 있습니다. 이게 베드로가 맞나 싶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어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습니다. 저 자신은 잘 안 변하고 그저 그렇지만, 주님의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난 사람들은 그들의 타고난 성품의 연약함도, 또 부족함도 때가 되면 고쳐지고 다듬어지는 것임을, 오늘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의 삶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학교도 하고 있지만, 사랑의 사도로 알고 있는 그 요한, 그의 본래 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우레의 아들’입니다. ‘the son of thunder.’ 그의 성격과 성품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습니다. 요한복음학교에서 도마에 관한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도마는 의심이 워낙 많아서 지금도 영어에서 ‘doubting Thomas’(의심 많은 도마)가 하나의 관용구로 사용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머물렀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멀리 인도 남부까지 복음을 전한 사도다운 사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람, 변합니다.  베드로가 오늘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그것은 물론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일 겁니다. 베드로를 향해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베드로의 연약함을 외면하거나 그런 성급함을 언급하시며 타박하신 적이 없습니다. 단 한 번도 말입니다. 다시 그 모든 과정과 성숙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갔을 때에도, 주님은 언제나 처음부터 차례대로 다시 말씀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하던 그 순간도 주님은 미리 알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너, 그 정도 인간이니까, 그걸 잊지 마라.” 이게 주님의 초점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비록 그런 자리에 네가 가 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넘어져서 오래 엎드려 있지 말고, 얼른 일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일어나 네가 돌봐야 할 나의 귀한 양들이 너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네가 돌이켜 일어나면 다른 사람들을 일으켜주고 세워주어라, 너는 머물러 있을 사람이 아니라, 자라서 누군가를 돌봐야 할 사람이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기 위해 베드로에게 그 배신의 자리를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베드로는 언제나 ‘더 나은 베드로’ ‘지금과는 다른 베드로’였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베드로를 그렇게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한 발, 한 발, 예루살렘에서 룻다로, 룻다에서 욥바로,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그의 마음이 깨달아지는 그 자리까지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해주셨습니다. 한 번에 어디로 가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천천히 그 긴 발전의 여정을 성령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기다림으로, 오늘 베드로는 다시 자신을 비난하는 성도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받은 그대로,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인내와 사랑으로, 주님이 부탁하신 이들을 그렇게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듯, 그렇게, 기다리며, 일으키며, 참으며, 그들을 고넬료에게 잇대도록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이 공동체의 요람에서 자라게 하십니다. 불완전한 서로를 성령으로 묶으셔서, 진리로 인하여 함께 자라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이든, 누구와든, 소통을 이어가고 끊임없이 부대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죄라는 것의 성격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하나님을 배제시켜버리게 만드는 것, 하나님과 우리를 서로 원수 되게 하는 것, ‘디아크리노’의 관계로 만드는 것, 그것이 죄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선을 긋고 서로를 향해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드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것이 사탄이 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비단 그 강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서로를 향해서도 만들어집니다. 서로가 상호의존적인 지체로 있지 못하게 만들어, 상대를 아예 무시하여 외면해버리거나, 아니면 나에게 동화시켜버리고자 하는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죄의 또 다른 현실의 결과입니다. 요컨대 죄란 하나님이 결합하신 것을 나누어버리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미로슬라프 보프, ‘배제와 포용’ 인용] 십자가는 그 경계를 주님의 몸으로 허물어버리셨다는 선언입니다. 에베소서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모두 주님의 육체 가운데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그곳은 사람 몸의 지체들과 같이 서로를 배제할 수 없는 곳이고, 끝까지 함께 이야기하며, 그 거리를 좁혀 가야 하는 한 운명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비난하며, 선을 긋고 너와 나를 구별해도 결국 우리 모두는 연약하다는, 불완전하다는 차원에서 모두 같은 영역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영역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디아크리노’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5에서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고, 그저 선한 양심을 잃지 않고, 완전을 향한 대화와 인내를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라가고 있다는 것, 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베드로나 할레자들이나 부족하고 연약하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설명에 대해 당시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본문 18절인데요,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어떻습니까? 그들의 잠정적인 결론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의 행위가 정당하고 잘했다, 이런 의미입니까? 앞으로 이방인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느니, 아니면 할례를 통해 먼저 유대 공동체 안에 들어와야 한다느니 하는 그런 주장을 더는 하지 않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8절이 가리키는 바는, 말 그대로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인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는 고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율법의 준수나 할례의 문제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습니다. 이 글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는, 이제 이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해결을 위한 아주 작은 첫 발걸음이 내딛어졌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갈 길이 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에서 보듯이, 그는 여전히 이 문제를 극복하지를 못한 상황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3,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도 연약하고 할례자들도 연약합니다. 함께 자라가고, 함께 빚어져 가는 것이지 일방적인 가르침과 배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예루살렘교회와 그 밖의 많은 디아스포라 교회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는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방인의 수가 히브리인의 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아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교회들과 성도들을 책임지고 섬겨야 하는 책무를 가진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이보다 훨씬 더 큰 논란과 갈등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에도 다시 서로를 향한 신뢰와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분별력으로 바른 선택을 내리게 됩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하게 하라고 주님이 하셨지요? 그때 가서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극복하면 그만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지금의 서로를 이해하고 견뎌주는 일인 것입니다. 아울러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교만에서도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때까지는, 우리 모두는 서로를 향해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게 많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족하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문제의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이방인이 어떻게 유대인의 마음을 다 헤아리며, 유대인이 또 이방인을 어떻게 다 이해하겠습니까? 둘은 건널 수 없는 강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게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그러한 한계가 어쩌면 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를 향해 더 겸손하게, 더 온유하게 만듭니다. 저는 바벨탑이 하나님의 징계이자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하는 데리다의 말에도 공감이 갑니다. (‘환원할 수 없는 언어의 다양성’을 부과하셔서, 탑을 건축한 폭력에 대응하셨던 것입니다.) 언어가 다른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타자를 향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우리는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서로를 향한 발걸음이, 결국 주님의 십자가에서 만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가다 보면, 서로 처음부터 다시 설명하는 그 수고를 함께 포기하지 않다보면, 결국 우리는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주 안에 진정으로 하나 된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대화의 기회를 포기한 사람들은 혹시 없습니까? 혹시 마음으로 정죄하고 대화를 내려놓은 교회의 문제는 없습니까? 이미 선을 그어 여러분 밖으로 밀쳐낸 이들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구제불능이라고 아예 ‘디아크리노’해 버리신 사람은 없습니까? 먼저 대화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진리의 담대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위로가 넘친 베드로가 먼저 자신을 내려놓고 대화의 길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고 믿는 여러분이 먼저 포용의 두 팔을 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보프, 변용) 그렇게 저희 고백교회가 서로를 향한 좋은 요람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다른 교인들, 다른 생각과 견해를 가진 이들을 향해서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에 이르지 못한 것은 그 무엇도 완벽한 정의일 수가 없다.”고 라인홀드 니버가 말했습니다. 주의 성령으로 힘을 얻어 사랑에 이르는 정의, 그곳에 우리 모두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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