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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구제" 2015년 5월 17일 주일 설교

2015-05-17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6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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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17 부활절 일곱 번째 주 ----------------------------------------- 사도행전 10장 1~8절,  기도와 구제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517.mp3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 말씀으로 ‘기도와 구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주중에 스승의 날이 있었습니다만, 20년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만나자고 했던 한 선생님과 제자들의 만남이 한 방송사 뉴스에 나오면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습니다. 중학교 선생님이던 때 아이들과 헤어지는 게 서운하여 영상을 만들고 그러면서 20년이 지나고 선생님이 TV 광고를 낼 테니까, 그때 다시 만나자고 한 겁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고 정말 20년이 흐른 뒤 선생님은 약속을 지켜 광고를 냈고, 학생들은 이제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어, 아이와 아내, 남편과 함께 옛날 그 교실에 모였습니다. 인터뷰에서 한 제자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선생님과 20년 만에 다시 만나 포옹을 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더라고, 그런데 그때 마음이 울컥하더라고 말입니다. 아마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해주는 것, 그것만큼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에는 다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말 속담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우리네 일반적인 삶이 다 그렇습니다. 나에게선 잘한 것만 기억나고 타인에게선 못한 것만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잘한 걸 누군가가 기억하지 못할 때 사람은 서운하고, 그러면서 사람에게 잘 해도 별 소용이 없는 거구나, 실망합니다. 그리고 그 실망은 다음 번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보다 이기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요셉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그는 사람들이 나를 잊을 때에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자신을 통해 복을 받고 또 목숨을 구한 사람까지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잊혀짐의 시간이 흐르면서, 요셉 자신도 그런 일들에 대해 잊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요셉의 이름을 기억하셨고, 그의 삶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삶, 그것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우리는 요셉에게서 보고 배우게 되지요. 하나님이 누군가의 삶을 기억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단지 그 한 사람의 인생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사람의 삶이 또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라는 사람. 헬라어로는 ‘코르넬리우스’라고 하는 로마군 장교의 삶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하심을 통해, 이제 초대교회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가? 고넬료의 무엇이 하나님의 기억에 그를 남게 했는가? 읽은 4절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그가 한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로 올라가 닿았다, 하는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닿지 않는, 상달되지 못하는 기도와 구제가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매우 그렇다’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성도의 기도나 예배, 예물, 어떤 선행에 대해 그것을 받지 않으시고 외면해버리시는 것에 대한 수없이 많은 예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묵상하는 이사야서의 여러 말씀들이 아주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않겠다.”(이사야 1:15)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떤 신앙적 행위 그 자체보다도, 그것의 동기나 목적,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성 있는 무엇인지를 늘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 상달되는 구제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그것이 땅에 떨어지고 묻혀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다다르는 것이 됩니까?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한꺼번에 정말 화려하고 성대하게 드리듯, 그렇게 정성과 힘을 다하여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기도를 해도 몇 시간씩, 혹은 방언으로 특별하게 해야 하나님께 닿습니까? 선행은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나님만 아시는 일이 되도록, 몰래 하면 될까요? 물질로만 돕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도와야 그 구제를 하나님이 받으실까요?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고넬료의 삶과 그리고 이제까지 우리가 읽어 온 사도행전의 여러 말씀들을 기억해보면, 한 가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기도와 구제가 서로를 온전하게 만드는 신앙의 두 기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구제를 하나님이 받으시는 구제가 되게 하고, 구제는 역으로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영화 ‘제리 맥과이어’의 명대사, 주인공 톰 크루즈가 아내 도로시(르네 젤위거)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하는 그 명장면,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그때 제리가 아내를 향해 "You complete me."라고 말하지요. 말 그대로 “네가 나를 채워준다. 당신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준다.”는 의미입니다. 기도와 구제가 서로 그렇습니다. 기도는 구제를 통해 완전해지고, 구제는 기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고넬료의 삶도 그렇고 사도행전의 앞선 이야기들을 곰곰이 반추해보면, 역시 교회와 성도의 삶의 두 기둥이 바로 기도와 구제였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 다다르지 못하는 기도나 구제가 되는 많은 경우에, 바로 그 나머지 하나가 부족하거나 무시되곤 합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다른 사람을 향한 그의 태도와 삶이 그 기도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면, 그 기도는 말 그대로 이기적인 자기 욕망의 투사밖에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기도가 되지요. 예레미야애가 3:44에 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를 구름으로 당신을 가리심으로 상달되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신다기보다, 우리 자신을 받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통가운데 처한 이들의 삶을 돌보지 않는 성도의 기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먼저 뭘 구하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 하나님나라와 그 나라의 공의입니다. 그 나라와 의가 구체화 되는 것이 성도의 구제이고, 성도의 삶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선행될 때, 다른 것들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를 완성하는 것이 구제임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고넬료의 삶에서 구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우리는 여기서 이 구제의 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의 질과 의미에 대해서도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넬료는 당연히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이방인이자, 로마라는 지배국의 장교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그가 이달리야, 그러니까 ‘이탈리아’라는 이름의 군대의 백부장임을 알 수 있는데요, 백부장이면 말 그대로 100명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종성이 생각] 그런 그가 가이사랴라는 도시에 와 있습니다.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대략 50km 정도 북으로 떨어져 있는 도시입니다. 이름이 가이사랴인 것이 대단히 독특한데요, 도시 이름이 ‘케사르’ ‘시저’인 겁니다. 원래부터 있던 도시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이 도시는 헤롯 대왕이 로마의 황제 가이사랴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항구 도시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였기에, 로마에서는 이스라엘 땅을 다스리는 총독의 관저를 이곳에 두고 유다와 사마리아를 관리합니다. 우리 역사의 일제시대로 말하면 이등박문과도 같은 그런 총독이 머물며 다스렸던 그런 도시인 겁니다. 고넬료의 입장에서 이 가이사랴는 그러니까 그냥 식민지의 임시 거처 정도입니다.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그냥 잠깐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서 많은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2절의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는 그 말을 “모든 백성을 구제했다.”라고 옮기는 번역도 있는데요, 여기 이 백성이 어느 나라 백성입니까? 로마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당연히 이스라엘이지요. 자기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민족입니다. 일제시대 일본 장교가 조선 사람을 수탈하고 빼앗는 게 아니라,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을 일일이 돌보고 구제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중에 고넬료의 부하와 종들이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윗사람인 고넬료를 소개하는 장면, 본문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상황이 이 정도이니 이건 정말 상식 밖의 모습입니다. 다시 2절로 가보면 그가 경건하다고 했는데, 이것도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 군대에 다녀오신 형제들이 계시지만, 군인이 경건하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군대라는 조직의 성격 상, 또 그가 해야 하는 업무의 특성 상,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말과 일상이 험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이 그걸 닮아가게 됩니다. 더구나 고넬료는 지금 자기 나라에 있는 게 아니라 타지 생활 중입니다. 타국에서 사는 군인의 삶, 이건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대책이 없습니다. 여러분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면서 경건해지기 쉽겠습니까? 나를 아무도 모르는 남의 나라에 와서. 대충 살다가 적당히 가는 겁니다. 또 타지에서 외롭고 하기 때문에 더 삶이 문란해집니다. ‘미스 사이공’ 같은 뮤지컬이 그래서 나온 거지요. 그런데 이 고넬료는 그런 와중에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윤리적으로만, 신앙적인 외형으로만 경건한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경건한, 백성을 구제하고 섬기는 진짜 경건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앙적으로 경건하다는 것, 그 명확한 정의가 야고보서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1:27[신약성경 371쪽],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다시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바로 고넬료의 삶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는 그냥 기도만 많이 하는 그런 외적 경건에 매몰된 사람이 아닙니다. 경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지켜 행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걸 진정성 있는 신앙이라고 보통 말합니다. 신앙이 삶으로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 우리 교회 목표처럼, 삶이 복음을 고백하는 그런 삶입니다. 이런 진정성 있는 신앙의 결과가 바로 오늘 본문 2절의 내용입니다. 그의 가족이나 부하들이 함께 더불어 경건합니다.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보시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했습니다. 온 집안과 더불어, 그러니까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은 물론, 자신이 부리는 종들까지도 모두 그런 고넬료의 삶을 보며 함께 경건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신앙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기도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진정성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은 너무 멀리 있는 곳의 구제가 아니라, 내 가족, 내 가장 가까운 이웃들, 그리고 내가 머무는 그 삶의 경계선 안에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작은 배려와 섬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은 반드시 영향력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영향력이라고 하니까 대단한 것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 여러분의 가족에게, 여러분의 동료에게, 여러분의 지체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그들에게 미치는 삶의 영향력으로 그 진정성을 시험받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의 신앙이 살아남지 못하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배 역시 하나님 앞에까지 가는 동안 살아남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만의 삶에 매몰되어, 주변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신앙이, 우리가 행하는 삶의 구제를 통해 구제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기도와 찬송,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부디 ‘나’라는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진성성 있는 삶이 되기를, 구제가 우리의 몸에 스며들고 배어들어서, 삶의 한 모습이 되는 그런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구제 역시 기도를 통해 비로소 온전해집니다. 본문 3절에 보면 고넬료가 환상을 보게 되는 일이 제 구 시쯤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의 9시면 지금의 오후 3시인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오후 기도 시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가 유대인들의 기도 시간에 맞춰 정기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통해 지금 고넬료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가 어떻게 유대인의 기도 시간을 지켜 기도를 하고 있게 되었을까? 성경은 정확한 답을 주고 있지 않지만,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는 전래된 이방의 종교들에 환멸을 느껴서 유대교의 회당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공동체에 가담했던, 친유대교적인 이방인들이 다수 있었습니다. 아마 고넬료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베드로를 찾아온 메신저들이 고넬료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이방인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때 보통은, 그가 유대인의 할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미 유대교 입문의 절차를 마친 사람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넬료가 바로 그런 유대교 입문자였던 것이지요. 그런 고넬료가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한 가지가 바로 구별된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중요함을 모르는 성도는 없지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성도는 많은 것 같습니다. 고넬료의 오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의 기도를 독립적으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기도가 어우러지게 하시면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가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은 고넬료가 이제 종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모셔 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의 미션을 받은 메신저들이 이튿날 베드로를 향해 가고 있던 그때, 베드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요, 베드로도 역시 기도하는 시간이었음을 성경은 밝힙니다. 말 그대로 기도와 기도가 만나 하나님의 일이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성도에게 중요한 영적 신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 기도하고 있는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냥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말은 하는데, 그 기도가 정말 우리의 삶에 습관이 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특별히 구제나 하나님나라, 공의, 이런 부분들을 강조하면 할수록 기도를 소홀히 여기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여러분, 구제는 엄밀히 말해서 성도만, 교회만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구제 자체가 성도의 본질적인 능력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구제가 사람의 선행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 땅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쓰임 받으려면 그것은 반드시 기도라는 매개가 필요합니다.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일은 정작 일 그 자체보다도, 기도의 자리에서 완성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분주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움직이고 애쓰고 수고하는 그 자리에서가 아니라, 나의 부족함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성도의 진짜 능력이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를 필요할 때만, 생각날 때만 한다고 하는 생각은, 성도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착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2절 마지막 말씀처럼, 기도는 항상 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텐데요,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먹고 사는 삶인데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느냐? 이것은 매순간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 삶의 구별된 기도의 시간을 정하고, 그 기도의 시간을 지킴으로 삶을 정돈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루 세끼 식사를 합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도 최소한 한두 끼는 먹습니다. 매일 먹습니다. 식사를 하되 규칙적으로 하라고 의사들은 권합니다. 그게 건강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 식사를 하다 보면 참 희한한 일이 생깁니다. 식사 시간을 중심으로 삶이 정돈이 됩니다. 일을 하다가도 식사를 위해 브레이크를 하게 되고, 사람을 만나도 식사 시간을 끼거나 피하게 됩니다. 매순간 밥을 먹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먹기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먹는 것이 하나의 삶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그것을 통해 삶이 정돈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도는 기도하기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기도가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겠습니까? 기도가 정해진 시간, 구별된 시간으로 드려져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루 24시간 기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기도의 기준으로 정돈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시간, 몇 분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밥을 5분 만에 먹어도 식사이고, 한 시간 동안 먹는 밥도 있지만, 그것 또한 한 끼입니다. 단 몇 분이라도, 단 몇 초라도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나머지 모든 하루의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재배열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기서 시작되고 거기서 완성됩니다. 영성만큼 공평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기도를 못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든, 어린아이든, 누구든 하나님을 일을 시작하고 완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 앞에 엎드려 있는 그때, 비로소 주님의 일하심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선한 구제들이 우리의 능력의 경계를 넘어, 우리 인격의 경계를 넘어, 감히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로 온전하게 되는 것, 그것은 오직 기도를 통해서임을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처음부터 너무 많은 부담이나 욕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일단 단 몇 분이라도 여러분이 편히 할 수 있는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을 정하십시오. 그게 매일 안 된다면 일주일에 몇 번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그것을 포기하거나 타협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내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내 삶을 정돈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배가 별로 안 고픈데도 밥을 먹었나, 생각하듯 그렇게 기도에 삶의 우선순위를 부여하십시오. 거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일이 시작됩니다. 저는 우리 지체들이 기도를 통해 서로 더 긴밀히 연결되어 하나가 되는 꿈을 꾸고,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나의 기도와 너의 기도가 서로 연결되어 주님의 일을 이루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나의 능력과 너의 능력이 어우러져 가는 교회이기 전에, 나의 기도와 너의 기도가 함께 잇대어 세워가는 교회이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드리는 구별된 기도의 시간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말 그대로 항상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는 우리 고백교회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의 말씀이 되게 하십시다. 여러분, 기도와 구제는 서로를 온전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삶이 되게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이 되고 있습니까? 어디서 우리의 부족함이 보이고, 어디서 우리의 삶이 어그러졌습니까? 곰곰이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십시다. 기도하고 구제하되 너무 조급하게 우리의 삶을 몰아가지는 마십시다.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서두르지 마십시다. 오늘 이 사도행전 10장까지 오는 여정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가 쌓이고 구제가 이어지는 삶 속에 하나님은 언젠가 반드시 계획하신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을 여러분이 기억하십시오. ‘기억’이라는 말,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은, 어떤 우리의 행위가 곧바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비로소 뭔가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하고 구제했을 때 그때 바로 이뤄지는 경우도 있는 반면, 정말 중요한 일들은 시간의 체에 걸러져 그 진정성이 통과되었을 때 시작되는 것임을 잊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우리의 경계 너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며, 조용히 누군가를 섬기는 일을 시작하십시다. 부디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이 기억하셔서, 주님의 일을 위해 귀하게 드려지는, 아름답고 복된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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