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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메섹에 있는 제자들" 2015년 3월 1일 주일 설교

2015-03-01 · 게시된 설교 원문 · 약 15분 읽기

강조된 문장은 Q&A 답변의 근거입니다. 앞뒤 문맥을 포함한 설교 전문을 아래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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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사순절 두 번째 주 ----------------------------------------- 사도행전 9장 10~22절,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 * 설교 음성파일 : http://file.ssenhosting.com/data1/kafka21th/20150301.mp3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말씀으로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혹시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내용을 가진 책이 혹시 어떤 책인지 아시는지요? 네, 누가복음입니다. 24장까지. (그러나) 28장까가지 기록된 마태복음이나 사도행전보다 더 많은 분량입니다. 그런데 참 독특하게도 그런 사복음서 중에서 ‘제자’라는 이 단어를 가장 적게 사용한 것이 또 이 누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의 절반 정도밖에 사용되지를 않았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용된 횟수를 다 더해도 마태복음에 미치지 못할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이 제자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에서보다도 더 적은 부분에서 제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정말 제자다운 사람에게만 그 명칭을 붙여줍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다름 아닌 누가이기 때문에 이것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날카로운 지성과 간결한 필치, 그리고 객관적인 진술을 그 특징으로 하는 누가의 문체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제자는 그냥 믿는 성도를 싸잡아 표현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어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사도행전 9장이 정의내리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도를 따르는 사람들, 그냥 입으로 믿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실로 그 길을 뒤쫓아 걷고 있는 사람들을 누가는 제자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일컬어 누가는 제자들이라고 명명합니다. 앞서 아나니아에 관해 우리가 말씀을 나눌 때에도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읽은 본문 처음 부분, 10절에도 보면 아나니아를 일컬어 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다메섹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이름은 물론 구체적인 구성원에 대해서도 우리는 성경 본문을 통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오늘 읽은 본문의 후반부, 그러니까 19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 속에 포함된 정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19절 후반부와 20절을 한 번 보십시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라는 주어와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다’는 술어 사이에 한 가지 내용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1)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바울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 하나와 그 결과 2)‘즉시로’ 뭔가를 했다는 표현입니다. 사울은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 시력을 잃었고, 그 후 아나니아를 비롯한 다메섹에 있는 어떤 사람들과 며칠 함께 있은 뒤, 즉시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이 이겁니다. 제자는 제자를 낳는, 제자를 세우는 존재들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제자는 결과적으로 제자 삼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처럼, 예루살렘이든, 사마리아든, 땅 끝이든, 제자가 가는 곳에서는 반드시 제자가 세워지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누군가가 주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그를 통해 제자가 세워지는가를 보면 됩니다. 물론 이러한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그렇게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상태에서, 즉시로 예수를 전하는 일에 뛰어들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이 사울에게 하신 말씀은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리고 눈을 뜨게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3년간이나 듣고 보고 배운 것과 비교하면 사실 사울은 주님을 만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얼마나 정화하게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걸 안다고 즉시로 사람 모여 있는 곳에 가서 그걸 전하는 데 전념하는 것도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본문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사울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유명 인사입니다. 매우 영향력 있는 율법 지도자이자, 정치적인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돌변하여 스스로 커밍아웃을 감행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삶이 거짓이었음을 밝히며, 예수를 전하고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며칠 있은 후, 즉시로 사람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다. 만약 우리 공동체 안에 사울과 같은 사람, 새로운 한 사람이 정말 특별한 경험을 통해 예수를 만난 사람이 찾아왔고, 며칠 동안 우리와 함께 지냈다고 생각해봅시다. 과거에 예수를 싫어하고 또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싫어했던 그 사람이 우리와 주님 안에서 함께 교제했다고 했을 때, 며칠 만에 그가 완전히 돌변하여 복음을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전하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들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무엇을 사울과 함께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과의 짧은 동거를 통해 사울은 말 그대로 또 한 사람의 제자로 거듭납니다. 사울이 자신을 일컬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그렇게 태어난 주의 사도였다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은 그런 사울을 건강한 제자로 세워가는 영적인 인큐베이터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고,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의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진정 제자, 마데테스(μαθητης)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명실상부한 주님의 제자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마 그 며칠 간 사울은 무엇보다 예수님에 관한 말씀,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많은 말씀들과 행적들을 집중적으로 듣고 배웠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삶을 통해 고스란히 보고 느꼈겠지요. 무엇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말씀의 공동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말씀을 향한 사랑은 매우 유별납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모하고 즐겨 읽습니다. 쉐마의 말씀으로 유명한 신명기 6장에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나옵니다. [구약 271쪽]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로 이때부터 이 명령을 지켜나갑니다. 종이가 없던 시절이니 이 말씀을 천이나 가죽에 써서 손에 매고, 이마에 두르는 겁니다. 이걸 경문 또는 경문갑이라고 합니다. 손목에는 주로 말씀이 기록된 천으로 된 끈 같은 것을 칭칭 감았고 이마에는 그걸 넣은 조그마한 상자를 역시 끈으로 묶어 매달고 다녔습니다. [경문(Phylactery)이란 4군데의 성구, 즉 출 13:1-10, 11-16 ; 신 6:4-9; 11:13-21 등을 4개의 양피지에 적어 놓은 것]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적들, 그리고 예수님에 관한 말씀들에 대한 기록이 문제입니다. 여기 있는 신약성경을 읽으면 되었겠지만, 여러분 사울이 회심하던 이 시기에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경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사울의 회심, 주후 30년 대 초반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문서로 기록된 것은 대체로 50년에서 150년 사이입니다. 그 중 4개의 복음서는 70년경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 40년이 지난 후에 쓰였음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사울이 다메섹에 있을 때에는 기록된 말씀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인 책들은 바로 이 바울이 기록한 바울서신으로서, 51년경에 쓰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살로니가 전서와 49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갈라디아서입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이 가진 거라고는 아마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부분 부분의 말씀들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들은 그것들과 함께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말씀들을 머리로 외우고 적으며 그렇게 말씀을 묵상했고, 또 사울과 같은 새가족을 양육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을 통해 그 소리와 문자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의 제자입니다. 스스로 말씀의 현실이 되는 삶. 그 삶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가 바로 그 모습의 실체이자 표본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 암송해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들 속에 함께 사는 겁니다. 그게 예수입니다. 그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 곧 제자들 또한 같은 운명,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내 몸과 삶이 말씀을 보여주고 들려주는 또 하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광임을 예수께서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깊이 천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제자로 빚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사울, 사도 바울, 정말 위대한 전도자요, 주님의 제자요, 신학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를 기른 건 팔 할이 다른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이 사울을 전도자로 세우는 게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이름 없는 제자들입니다. 목회자가 아니라 여러분과 같은 일반 성도들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를 아십니까? 사울이 사울 되는 것은 여러분이 해내는 일입니다. 사울이 없어도 다메섹의 성도들은 주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기둥은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교회는 제자들이 이끌어가고 제자들에 의해 세워지는 겁니다. 믿습니까? 고백교회의 기둥은 누구입니까? 고준석 목사입니까? 그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양육을 받고 저와 함께 자라고 있지만, 속히 주님의 제자로서, 사울과 같은 일꾼을 스스로 양육해내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고백교회를 떠납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끝나는 날 생각을 하느냐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러분이 이 교회 있는 동안 저는 은퇴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 교회의 미래는 누가 결정하며 누가 그 일을 가당합니까? 제가 이 교회의 방향을 정합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목사가 아닙니다. 목사가 대표로서 서 있지만, 실제적인 교회의 능력은 성도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을 주의 제자로 세워가는 일을 감당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가 어디서 옵니까? 목사 한 사람만 제자가 되면 되고, 나머지는 다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것에서 거의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수는 많은데 제자가 없으니,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지는 겁니다. 성도들이 제자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없으니, 목사가 함부로 날뛰고 말씀에도 없는 일들을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은 숫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많은 수, 그걸 그냥 성경에는 무리, 군중, 수많은 사람들, 그냥 그렇게 부릅니다. 한국 교회의 이 많은 성도들이 과연 그 모습이 아닌지,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국 기독교인의 수는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수를 자랑합니다. 여전히 수만 명 모이는 교회가 있고, 여전히 주일 아침이면 교인들을 실어 나르는 대형 버스들이 전국 곳곳에서 운행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한국 교회에 주의 제자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 오늘 사울에게 일어난 이 거룩한 변화가 과연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정반대였지요. 오늘 이 다메섹의 사건이 우리의 현실이었습니다. 오늘이 3.1절이고, 또 3.1절 기념주일이기도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는 민족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수는 당연히 적었지요. 당시 사료는, 1919년 3월 당시 일제 강점기 조선의 전체 인구는 1,678만 8천400명이었다고 기록하는데, 그때 기독교인의 인구는 전체 인구의 단 1%입니다. 지금 일본의 기독교인 수와 정확히 같은 비율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결코 미약한 기독교가 아니었습니다. 바다에 소금이 많아 짠 맛을 내는 게 아니라, 단 3.5%의 소금이 바닷물의 정체성을 결정하듯이, 예수님이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단 1%의 성도들이 당시 우리 민족의 길을 제시하고 앞장섰습니다. 아시는 대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개신교(천도교 15명, 불교 2명) 출신입니다. 가장 많은 수이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적은 무리여’라고 부르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신 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수가 많다고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흥이 뭔지, 하나님나라가 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당시 그 소수의 기독교인들을 통해서, 주의 길을 가는 제자들을 통해서, 조선 사람들은 나라의 살 길을 보았고, 희망과 미래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나 주님의 제자라고 성경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아예 단호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문제가 그저 잘 믿고, 못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직결된 문제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복음에서는 이 대목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록하여 전합니다. 누가다운 세밀한 묘사인데요, 누가복음 13:22~24입니다. “22.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주의 제자가 많다는 말입니까, 적다는 겁니까? 원래부터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어서 사람들이 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어느 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우리 안에서 사울과 같은 주의 일꾼이 길러지고 세워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런 꿈, 제자가 되는 꿈, 제자를 세우는 꿈을 꾸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보여주고, 전하는 삶으로 여러분이 나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이 없어도 성경을 살아낸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왜 그 길을 감당하지 못합니까? 여기 말씀이 있는데도, 수많은 책과 도움이 될 많은 자료들이 넘쳐나는데도, 여러분은 과연 그런 일들을 마음에 품고, 또 실현해 가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여러분에게 삶의 등불입니까? 오늘 사울은 우리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정녕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정말 여러분에게도 바울처럼 가장 고상합니까? 그런데 왜 말씀 앞에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까? 언제까지 주여, 주여만 하는 게으른 무리로 남아 있을 겁니까? 언제까지 묵상하고 나누고 하는 일들이 여러분에게 짐이 되고, 그걸 하는 걸 대단하다고 여겨야 합니까? 여러분 예수의 제자인 것이, 그 도를 따르는 삶이 혹시 부끄럽거나 창피합니까?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정말 주의 제자입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는 청년입니까? 그냥 교회 다니는 청년입니까? 예수 외에는 그 무엇도 배설물로 여기는 진짜 제자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복음 안에서 커밍아웃 했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제자인 것을 주변의 모든 이들이 다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사울이 다메섹의 제자들의 깊은 영향 아래 잠기듯, 그렇게 여러분의 제자 됨에 그 사람들이 잠겨 있습니까? 그래서 제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스스로 제자의 꿈을 꾸지도 않고, 누군가를 제자 삼는 꿈을 꾸지도 않는 성도를 향해,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나는 너희가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다. 내게서 떠나가라.” 반면 오늘 본문의 이름 없는 다메섹의 제자들, 그들은 비록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아무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주님은 그들을 기억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들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일들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지난 목요일, 저는 친구 동료 목사들과 점심을 같이 했습니다. 아버님 기일에 보고 처음 보는 친구들이었습니다. 저희 기수 동기 목사들 중에서 지금 담임 목회를 시작한 목사들만 모인 자리였습니다. 모두 다섯 명인데, 이번엔 네 명만 모여서 함께 식사도 하고, 사역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기도 제목들도 나눴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가 가장 작은 터라, 주로 저는 듣는 편이었습니다. 들으면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많이 생각이 났고, 얘기를 하면서도 속으로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적은 무리이면 뭐가 어떻습니까? 우리 지체들 주님의 제자가 되면 족하지 않습니까? 주님, 우리 모두가 주의 제자로 세워지게 은혜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사울과 같은 제자가 세워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여러분이 스스로 주님의 제자로 세워지는 꿈을 꾸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 말씀하신 좁은 길을 가겠노라고 결단해야 합니다. 삶이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는 모습, 이제는 좀 그만 하고, 그 좁음을 당연히 여기고, 관점과 생각을 바꿔서 그것을 통해 제자로 빚어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세상과 똑같은 모습으로 불평하고 기도하고 있겠습니까? 시편103편, 다윗 왕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사야도,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감과 같을 것이다.) [고난,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가 버립시다. 독수리는 크고 힘 있는 날개와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사나운 폭풍우가 불어오면 모든 짐승은 숨고 피하기 바쁘지만 오직 독수리만은 폭풍우에도 굴하지 않고 더 높이 날아 구름위로 올라가 평화를 누린다. 인생에도 고난은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고난은 피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난과 당당하게 맞서 나가고자 하는 정신을 가지고 날개에 힘을 길러야 한다.] 내 목적이 주의 제자로 세워지는 것임을 잊지 말고 부디 좁은 길을 택하여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좁은 길은, 한 마디로 말씀이 여러분의 삶이 되는 길을 말합니다. 이 성경이 없어도 사울을 제자로 길러내는 일이 우리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기억하고 외우고 또 바르게 이해하는 오늘 다메섹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 교회의 기둥은 여러분이란 말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 되었을 때 나이가 딱 여러분 나이입니다. 나중에 제자 되는 게 아닙니다. 지금 못하면 평생 못합니다. 바쁘고 힘들어도 지금이 가장 덜 바쁘고 덜 힘든 시기라는 걸 잊지 말고, 지금 더 말씀의 자리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제자 삼는 그 모습으로까지 여러분 마음에 품으십시오. 지금 당장 아니어도, 그 마음을 품고 조금씩 좁은 길로 나아가면 됩니다. 피난민들이 모여 이름도 없이 세워진 그 다메섹 교회의 제자들이, 결국 사울을 주의 제자로 빚어내었듯이, 가장 작고 연약한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이 고백교회, 오늘 다메섹의 그 성도들처럼, 고백교회의 제자들이라는 말로 불리는 존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주의 일꾼이 풍성이 세워지고 길러지는, 진정한 제자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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